[비즈한국] 꼬꼬마 신입사원 시절 같은 팀에 거리감이 별로 없는 선배가 있었다. 성격도 좋고 유쾌하며 친절했고 본인 스스로도 그것을 자신의 장점이자 무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마음의 거리뿐 아니라 물리적인 거리, 즉 퍼스널 스페이스에 대한 인식도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누구에게나 스스럼 없이 친밀함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능력임에 틀림없었고, 그 덕에 회사 내에서도 ‘핵인싸’였다. 하지만 그 표현 방식이나 태도가 너무 과하면 누군가에게는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걸 그간 아무도 지적한 적이 없던 모양이었다.
분명 업무 얘기를 하고 있는데 어느새 등 뒤로 다가와 내 의자에 자신의 몸을 기대고 있거나,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어깨나 등을 쓰다듬으며 손을 올린다든지,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불현듯 팔짱을 끼는 일이 예사였다. 본인 나름은 직속 후배이고 같은 여성 근로자로서 허물없는 사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사람 사이의 공간과 거리에 예민한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그때마다 불편한 표정을 짓고 어색하게 웃으며 ‘너무 가까운 것 아닌가요?’라며 에둘러 말해봤지만 그때뿐이었다.
두 달쯤 참고 지내다가 퍼스널 스페이스에 대한 그림을 출력해서 선배에게 내밀었다.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는 1m 정도가 적당한 것 같으니 그 거리를 지켜달라면서 말이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종이까지 펼쳐 내보이는 모습이 SNL코리아 ‘MZ오피스’에 나오는 맑은 눈의 광인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 넘는 행동에 대한 불편함을 참고 견디며 뒤에서 욕할 바에야 한 순간 불편하더라도 명확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유지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선배도 순간 불쾌한 내색은 했지만 앞으로 신경 쓰겠다고 답했고 실제로도 조심히 해주었다. 그 선배의 소위 ‘패밀리 멤버’ 에는 영영 들어가지 못했지만 원하지도 않았기에 그다지 아쉬울 것도 없었다. 애초에 회사에서 무슨 ‘패밀리’란 말인가.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공간과 거리가 필요한 법이다. 적당한 거리를 찾지 못하면 인간관계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이기도 하고 마음의 거리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거리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보편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의 적당한 거리는 1m 안팎이 아닐까 싶다. 잘 모르는 타인끼리 한 손씩 뻗어 적당한 호의와 정중함을 담아 악수를 나누는 거리. 실제로 많은 심리학자나 문화인류학자들이 고대 로마 시대의 방패 크기, 비를 피하는 우산의 지름, 사람이 펼친 양팔의 길이 등을 근거로 우리가 안정감을 느끼는, 최소한의 자기방어가 가능한 본능적인 거리로서 1m를 이야기한다.
사람마다 제각각 그어 놓은 자기만의 선이 있다. 그 선을 넘어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면 불편함에 한발 물러서게 되고, 또 한 발 더 다가오면 불안함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면 위협과 공포심을 느낀다. 꼭 물리적인 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선을 넘어 지나치게 향하는 관심, 쉽게 말해 과도한 ‘오지랖’과 ‘친밀감을 빙자한 사적영역에 대한 개입’은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 선을 넘은 이가 관계나 지위의 우위를 갖고 있다면 지금은 100% 직장 내 괴롭힘이 되고 성희롱이 된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불가근 불가원이라 하지 않던가. 너무 가깝게 두고 사귀어도 문제고, 너무 선을 긋고 개인에만 침잠해 자발적 왕따로 지내는 것도 절대 득이 되지 않는다. 선을 넘어오면 한발 물러섰다가, 멀어졌다 싶으면 이번에는 내가 한 발 다가서기도 하면서 1m를 팽팽하게 유지해 나가는 것이 상처받지도 상처주지도 않는 적정한 인간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얼마 전, 상가집에서 오랜만에 선배를 마주쳤는데 십수 년 전 퍼스널 스페이스 종이쪼가리의 추억을 안주거리로 꺼내는 바람에 얼굴이 조금 홧홧해져 버렸다. 그래도 선배는 ‘지금이라면 동성 간 성희롱으로 신고대상 아니었겠냐, 네 덕분에 그때 일찍 깨달아 천만다행이다’고 웃으며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누가 뭐라든 나름의 방식으로 적정거리를 지키며 지내온 지난날이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걸 확인한 기분이었다.
필자 김진은?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을 합쳐 3000명에 달하는 기업의 인사팀장을 맡고 있다. 6년간 각종 인사 실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비법을 ‘알아두면 쓸데있는 인사 잡학사전’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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