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어떤 사물이나 개념이 상황에 따라 점점 변해 가는 모습을 필자는 ‘힘을 받는다’ 라고 비유한다. 물론 그런 물리력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으로 인해 형태가 서서히 바뀌는 것을 말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디자인 분야의 경계를 넘어 살피다 보면 언뜻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곳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독일 BMW를 대표하는 상징 키드니 그릴과 한글 폰트 형상의 변천사가 그렇다.
초창기 항공기 엔진과 모터사이클을 만들던 BMW의 승용차 부문은 1928년 오스틴 세븐을 라이선스 생산한 딕시로부터 출발한다. 키드니 그릴이 처음 장착된 것은 1933년 출시된 303이었다. 당시 자동차의 엔진룸은 세로로 긴 수직 형태였기에 그릴도 수직이 일반적이었다. 당연히 키드니 그릴도 위아래로 긴 수직, 정확히 ‘신장’(kidney)에 가까운 디자인으로 장착되었다. 이후 나온 328, 503 등도 모두 그렇게 나왔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2차 세계대전 후 헤드램프가 차체 안으로 들어가면서부터다. 수직 배열이었던 자동차의 프런트 레이아웃 자체가 수평형으로 바뀌면서 기존 수직 키드니 그릴과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1500이나 2002 같은 올드 BMW를 보면 그런 과도기의 흔적이 보인다. 1960년대를 넘어 70년대 출시된 1세대 3, 5, 6, 7시리즈 모두 중앙의 얇은 수직 그릴을 고수했다. 그러던 중 1986년 선보인 2세대 7시리즈부터 팽팽하게 버티던 그릴이 계속되는 힘 속에서 옆으로 눌리기 시작하여 수평 레이아웃에 맞는 와이드 그릴이 적용됐다. 이런 기조는 1990년 3시리즈(E36), 1994년 5시리즈(E34) 페이스리프트에도 적용되어 수평형 와이드 그릴이 완전히 자리 잡았다.
본래 세로쓰기로 창제된 한글은 근현대 들어와 가로쓰기로 변하면서 많은 변화를 거쳤다. 문자 기능의 끝을 추구한, 예나 지금이나 극한의 환경에 놓인 한글 서체라면 신문에 쓰이는 서체를 꼽을 수 있다. 과거 세로쓰기로 된 신문 본문체를 소위 '편평체'라고 했다. 이것은 이름에서 추측되듯 글자틀이 가로로 긴 직사각형 모양인데 세로쓰기라는 틀 속에 최대한 많은 글자를 집어넣기 위한 디자인이다. 위아래로 눌리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글자가 넓어진 것이다.
그러던 것이 가로쓰기로 레이아웃이 바뀌면서 위아래보다 좌우로 눌리는 힘이 강해져 점점 가로로 좁은 모양이 되기 시작했다. 옛날엔 가로·세로 1000Unit 정방형 글자틀이 일반적이던 온자 너비가 좁아지면서 가로가 900Unit에 가까운 서체도 심심찮게 나오게 됐다(물론 여기엔 기술적 제한이 사라진 까닭도 있다). 예를 들어 본문용으로 널리 쓰이는 ‘Sandoll고딕네오’의 경우 세로로 길쭉해 보이는 920Unit의 폭을 갖고 있다.
현재 키드니 그릴은 다시 위아래로 커지는 추세다. 정확히 말하면 방향을 가리지 않고 대형화되는 모습이다. 범퍼와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수평형 레이아웃이란 틀이 깨지고 아래쪽으로 그릴을 대폭 키워도 문제가 없게 됐기 때문이다. 한글 서체의 틀 역시 기술적 제한이 점점 사라지고 옛 서체 디자인의 장점이 재발견되기도 하면서 어떤 뚜렷한 경향 없이 폭이 점점 다양해지는 추세다. 완전히 다른 분야의 사물이 비슷한 뉘앙스 속에서 진화해 나가는 양상이 흥미롭다.
필자 한동훈은? 서체 디자이너.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현재 서체 스튜디오 얼라인타입에서 다양한 기업 전용폰트와 일반 판매용 폰트를 디자인한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등에 기고했으며 온·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서체 디자인 강의를 진행한다. 2021년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한동훈 서체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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