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게임중독’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검찰이 지난 7월 발생한 신림동 흉기 난동 살인 사건의 피고인이 게임중독으로 인해 범행을 저지른 것처럼 발표하면서다. 이를 두고 게임업계뿐만 아니라 정치권, 학계까지 반발하고 나선 가운데 게임 이용 장애 질병코드 도입 현황이 주목된다.
#게임중독이 살인 원인? “정부가 육성 주장하더니 하루아침에 악의 원흉”
신림동 흉기 난동 살인 사건은 7월 21일 오후 2시경 서울 관악구 신림역 인근에서 거리를 오가던 행인이 무차별 칼부림을 당한 사건이다. 피해자 4명은 모두 20~30대 남성으로 1명은 사망, 3명은 부상을 당했다.
검찰은 지난 11일 이 사건의 수사 결과에서 뜻밖의 단어를 꺼냈다. “피고인 조선이 현실과 괴리된 게임중독 상태에서 ‘불만과 좌절’이 쌓여 저지른 이상 동기 범죄”라며 범죄 배경으로 게임중독을 강조한 것. 조 씨가 최근 8개월간 게임에 시간을 쏟거나 관련 동영상을 시청했고, 범행 당시 신속하게 재정비하는 등 특이한 행태를 보였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수사 결과를 보면 가족관계 붕괴, 취업·결혼 실패 등으로 불만이 쌓인 조 씨가 또래 남성을 향한 열등감을 적개심으로 표출하면서 무차별 칼부림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검찰 발표 이후 곳곳에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게임 관련 법안을 다수 발의한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이상헌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4일 “정부 차원에서 게임 육성을 주장하더니 하루아침에 악의 원흉으로 만들었다”라며 “검찰이 게임중독을 사건 원인으로 꼽은 이유와 배경에 대해 상세한 해명을 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문체부도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이 의원이 검찰의 발표에 관해 질의하자 문체부는 “게임중독이라는 표현은 법적·행정적·의료적으로 명확히 정의된 개념이 아니므로 사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라며 “게임 이용과 범죄 사이에는 과학적으로 상관관계가 밝혀진 바가 없다. 이용 시간이 많다고 범죄와 연관을 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라고 답했다.
이장주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 소장은 “온라인 게임이 등장한 초반에야 사람들이 경계심을 갖고 문제라고 여겼지만, 세대가 바뀌면서 ‘문제가 아니다’는 합의가 전 세계적으로 이뤄졌다”라며 “1990년대 말에나 나올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 개탄스럽다”라고 지적했다.
이 소장의 말처럼 국내에서 게임중독 논쟁이 활발하게 일어난 건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다. 온라인 게임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청소년 건강 문제와 과몰입 등 게임의 유해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급기야 2011년 청소년의 게임 이용 시간을 통제하는 ‘셧다운제’가 도입됐다가 실효성 문제, 청소년 권리 침해 등 논란 끝에 2022년부터 폐지됐다.
산업계·의료계·시민단체·학계 등이 대립한 게임중독 논쟁은 2010년대를 지나며 점차 사그라졌다. 게임의 유해성과 인과관계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데다 산업이 급성장하면서다. 국내 게임 산업 규모가 20조 원을 넘고 콘텐츠 수출 비중의 60% 이상을 차지하면서 게임은 ‘수출 효자’로 여겨졌다.
#문체부 “게임중독 정의된 개념 아니다”
게임중독이 다시 주목 받은 건 2018년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 이용 장애(gaming disorder)를 질병코드로 포함한 국제질병·사인분류(ICD-11)를 발표하면서다. 정부는 2019년 5월 국무총리실을 중심으로 한 민관협의체를 출범해 게임 이용 장애 질병코드의 국내 도입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체부의 말처럼 게임중독 개념조차 분분해, 결론을 내리긴 쉽지 않아 보인다. 민관협의체는 기초자료 마련을 위해 2020년부터 국내 게임 이용 장애와 관련한 연구를 발주했는데, 편향성 문제가 생기는 등 아직 완료하지 못한 상태다. 민관협의체가 용역 발주한 연구는 △게임 이용 장애 질병코드 등재 과학적 근거 분석 연구 △게임 이용 장애 실태조사 기획 연구 △게임 이용 장애 질병코드 도입에 따른 파급효과 연구 총 3개다.
그 중 보완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 건 실태조사 기획연구다.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은 용역 발주를 위한 제안요청서에 추진 배경을 ‘기존 연구 결과에서 제시한 진단도구의 중립성과 타당성 검증이 필요’ ‘중립적인 연구 설계 및 연구진 구성으로 기존 연구 결과 검증’ 등으로 명시했다. 업계 전문가는 “연구 목적이 질병코드 도입 여부를 정하는 건데, 기존 연구의 조사 척도가 유병률이 높게 나오게 만들어져 편향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안다”라고 전했다.
콘진원은 국가종합전자조달시스템(나라장터)에서 2022년 12월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보완 연구용역을 모집했다. 앞선 네 차례 모집에서 무응찰·단독응찰·기준점수 미만(과락) 등의 사유로 유찰을 반복했기 때문. 지난 3월 다섯 번째 모집에서 한국심리학회가 낙찰자로 결정됐다. 8000만 원으로 책정됐던 사업비는 올해부터 1억 2000만 원으로 증가했다. 보완연구 수행 기간은 10월 30일까지나 결과는 연말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그사이 민관협의체 회의도 멈췄다. 문체부에 따르면 보완 연구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지난 2022년 10월 9차 회의를 끝으로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지난 4월 5일 국무조정실은 보도설명자료에서 “재검증 용역의 진행 상황에 따라 개최 일자를 결정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질병코드 도입을 두고 정부의 논의가 길어지면서 게임업계는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 새로운 질병코드를 도입하더라도 시행은 2031년에나 가능할 전망이다. 문체부 관계자는 “통계청이 코드를 도입하기까지 사전 준비, 시범 운영 등을 거쳐 장시간이 소요된다”라며 “2026년 시행하는 제9차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에 ICD-11 반영은 어렵고, 2031년 시행하는 제10차 KCD에서 반영이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표준분류의 개정 주기는 5년으로, KCD는 연도 끝자리 0·5년마다 ICD 등 국제 코드를 기준으로 국내 상황에 맞춰 갱신한다. 제8차 KCD는 2020년 개정·고시해 2021년부터 시행했다. 민관협의체 출범 당시 ICD-11를 이르면 제9차 KCD에 반영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사회적 합의가 길어지면서 도입이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무조정실이 지난 3월 별도로 연구 용역을 발주해 화제가 된 ‘게임산업 규제 개선 및 진흥 방안’에선 질병코드 도입 여부를 분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조정실 산하 규제혁신추진단 관계자는 “이 연구는 게임 수출 규제를 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라며 “과몰입 등 산업 관련 문제는 현황을 조사한 정도다. 현재 연구가 완료돼 결과를 검수 중이며, 연구 내용은 대외비”라고 답했다.
심지영 기자
jyshim@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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