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시작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스타트업에서 ‘끝’은 보통 더 큰 회사에 매각되거나 주식시장에 상장되는 IPO 등의 엑시트(EXIT)를 의미한다. 스타트업 창업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엑시트보다도 폐업의 방향으로 가는 스타트업이 훨씬 많다. 엑시트 이전에 문을 닫는 회사가 90%에 달한다. 그야말로 멀고 험난한 과정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스타트업의 여정이 끝나도 기업가의 인생은 계속된다. 창업자들은 스타트업에서 겪은 실패와 성공을 모두 발판 삼아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아 나선다.
성공한 창업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몇 번 사업을 말아먹었다가 끝끝내 성공한 경우가 있다. 미국 매치그룹에 2조 원에 회사를 매각한 안상일 하이퍼커넥트 대표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김밥 판매, 옷 가게, 검색엔진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창업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10전 11기 끝에 하이퍼커넥트를 창업해 성공했다. 성공했기 때문에 알려진 이야기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연쇄 창업하는 경우도 있고, 창업가 이후 투자자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창업 이후 투자자로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
#VC 투자자로 변신한 유럽 창업가들
오스트리아 빈에 본사가 있고 베를린, 뮌헨, 런던, 파리에 사무실을 둔 유럽의 VC 스피드인베스트(Speedinvest)는 성공한 창업가를 파트너로 적극 영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럽의 소규모 전자상거래 기업을 위한 물류 배송 서비스로 유명한 체크로빈(checkrobin)의 창업자 마르쿠스 랑(Markus Lang)은 2015년 스피드인베스트에 합류해 투자자로 변신했다. 그는 베를린, 빈, 런던을 오가며 유럽 전역의 B2B 소프트웨어 스타트업을 발굴, 투자한다. 과거 자신이 창업했던 전문 분야다. 투자자로 변신한 랑은 50개가 넘는 회사에 투자했는데, 유럽 최대 에듀테크 스타트업 고스튜던트(GoStudent), 독일어권 최대 리퍼브 전자제품 판매 플랫폼 리퍼브드(Refurbed), 직원 근무 및 교대 관리 소프트웨어 제작 스타트업 소나(Sona) 등이 그의 포트폴리오 기업이다.
스피드인베스트에는 또 다른 창업가 출신 투자자 프레데릭 하게나우어(Frederik Hagenauer)도 있다. 그는 2012년 디지털 학습 플랫폼 스카이브(Skive)를 창업한 후 2016년 경쟁사에 매각해 엑시트 했다. 이후 컨설팅사 맥킨지의 외부 전문가로 보험 플랫폼 프라이데이(Friday) 컨설팅 등 다양한 이력을 쌓다가 2019년 스피드인베스트의 파트너로 합류해 약 20개의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팀 일정 도구를 개발하는 런던 스타트업 서프보드(Surfboard), 핀테크 스타트업 비트(Vitt)가 그가 발굴·투자한 대표적인 기업이다.
제로엔 아츠(Jeroen Arts)는 공유 사무실과 미팅 공간을 예약하는 플랫폼 데스크부커스(Deskbookers)의 공동창업자이자 전 CEO다. 그는 2017년 스피드인베스트에 합류해 자신의 창업 경험과 비슷한 회사에 투자해 성장시켰다. 전자상거래 배송 서비스 플랫폼 버드(Byrd), 사진 촬영 예약 플랫폼 스마일러(Smiler), 디지털 코칭 스타트업 코치허브(CoachHub)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유럽 최대의 모빌리티 스타트업으로 유명한 티어(Tier)의 공동 창업자 율리인 블레신(Julian Blessin)도 2020년부터 스피드인베스트에서 투자를 시작했다. 티어는 스피드인베스트의 포트폴리오 회사였기 때문에 포트폴리오 회사 창업가에서 투자사의 파트너로 전향한 그의 행보는 무척 흥미롭다. 그는 티어 창업 이전에 뮌헨대학교 경영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다양한 VC에서 투자자로 일했고 보스턴컨설팅그룹 벤처투자 부문인 BCG디지털벤처스에서 투자자로 일했다. 이후 창업했다가 다시 투자자로 돌아왔다.
스피드인베스트는 프리 시드(Pre-seed)나 시드(Seed) 라운드에 중점을 둔 초기 투자사다. 투자금 규모는 70만 유로~130만 유로(10억~20억 원)이다. 유럽 스타트업에 주로 투자하고, 딥테크, 핀테크, 헬스·바이오 테크, 기후 테크 및 SaaS 분야에 투자한다.
스웨덴 스톡홀름에 기반을 둔 VC인 EQT 벤처스(EQT Ventures)도 창업가 출신 파트너들이 주를 이룬다. 총 12명의 파트너 중 8명이 창업 경험이 있다. 온라인 파일 공유 및 협업 도구를 만드는 스타트업 허들(Huddle)의 창업자 알리 미첼(Ali Mitchell), 로켓 인터넷에 인수된 케이터링 플랫폼 레몬캣(Lemoncat) 창업자 도린 후버(Doreen Huber), AI 기반 어시스턴트 서비스 제공 스타트업 줄리 데스크(Jullie Desk)의 창업자 줄리앙 오베카(Julien Hobeika), 여행자 정보 플랫폼 텝(Tep)의 창업자 톰 멘도사(Tom Mendoza), 로컬 보드카를 생산하는 기업 아워 보드카(Our/Vodka)의 창업자 테드 페르손(Ted Persson), 딜리버리히어로에 매각된 케이터링 배달 서비스 스먼치(Smuch)의 창업자 시브람 애이야가리(Shivram Ayyagari), 서아프리카 전자 상거래 플랫폼 아프리마켓(Afrimarket) 창업자 라니아 벨카히아(Rania Belkahia), 펨테크 스타트업 부스터리(The Boostery) 창업자 산드라 말름버그(Sandra Malmberg)가 그 주인공이다.
쟁쟁한 창업자들이 파트너로 영입된 만큼 포트폴리오도 화려하다.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해 프랑스 사업 부문이 영국 보험 대기업 어드미럴(Admiral)에 인수된 인슈어테크 스타트업 루코(Luko), 저탄소 배터리 생산 스타트업 베코(Verkor), 숙소 예약 플랫폼 홀리두(Holidu) 등이 이들이 투자한 스타트업이다.
EQT 벤처스는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스타트업에도 투자한다. 적게는 100만 유로(14억 원)에서 많게는 7500만 유로(1000억 원)까지 투자 규모도 다양하다. 스톡홀름, 런던, 베를린, 파리, 샌프란시스코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25년간 글로벌 투자사로 유명한 EQT의 벤처 사업 부문으로 미국과 유럽의 기술 생태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자신의 펀드를 직접 조성·투자하는 창업가들
기존 VC에 영입되어 파트너로 활동하는 창업가 외에 스스로 펀드를 조성해 VC를 설립하는 경우도 있다. 스포티파이 창업자 다니엘 에크(Daniel Ek)가 대표적이다. 다니엘 에크는 투자사인 프리마 마테리아(Prima Materia)를 설립하고 개인 재산 10억 유로(1조 4000억 원)를 투자해 펀드를 조성했다. 지금까지 프리마 마테리아는 단 두 곳의 회사에 투자했는데, 하나는 AI 기반 방위산업체 헬싱(Helsing)에 1억 유로(1400억 원)를 투자했고, 다니엘 에크 자신이 공동창업자로 참여한 헬스케어 스타트업 네코 헬스(Neko Health)에 투자했다. 그 밖에 프리마 마테리아는 기후테크에 투자하는 VC 페일 블루 닷(Pale Blue Dot)과 AI 분야 전문 VC 스트리트 캐피털(Street Capital)의 펀드 조성에 참여했다.
헬싱키 기반 글로벌 게임 회사 슈퍼셀(Supercell)의 창업자 일카 파나넨(Ilkka Paananen)은 2014년 가족과 함께 투자사 일루지안(Illusian)을 설립했다. 일루지안은 비영리 기업가와 영리 기업가를 가리지 않고 지원한다.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선도적인 투자 계획을 가진 VC가 펀드를 조성하는 데에도 동참한다.
음식 배달 플랫폼 볼트(Wolt), 중고·리퍼브 가전제품 거래 플랫폼 스와피(Swappie)가 일루지안의 포트폴리오 중 하나다. 비영리적 성격을 띤 포트폴리오로는 공동 게임 창작 및 플레이 플랫폼 원더숍(Wondershop)이 있다. 이들은 게임을 직접 개발하는 게임 회사이기도 하지만 주로 가족, 어린이, 친구 등이 함께 게임을 만들고 플레이 하는 것을 돕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
창업의 길에는 끝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새로운 방향성, 어렴풋이 보이는 끝이 지친 창업가들에게 잠시 숨 돌릴 기회를 준다. 주로 성공한 창업가들이 투자자가 되어 후배 창업가들에게 힘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지만, ‘성공’의 정의는 그때그때 다른 법이다. 이른바 성공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창업가라도 다시 혁신에 재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창업 생태계가 지속 가능할 것이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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