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조선시대 임금이 거처했던 법궁 경복궁은 그 중요성을 반증하듯 크고 작은 논란에 휘말려 왔다. 그 가운데 특히 컸던 논란을 꼽자면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가 있을 것이다. 이를 둘러싸고 한 시민이 남긴 댓글을 본 적이 있다. “한창 논쟁이 벌어졌던 1994년 당시 철거냐 보존이냐, 개인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차에 경복궁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근정전에서 나와 흥화문에서 앞을 보고 섰는데 숨이 콱 막혀 죽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철거 쪽으로 마음이 확 돌았다. 잠시나마 보존에 마음이 기울었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라고.
총독부 청사 철거는 경복궁 전체뿐 아니라 ‘광화문 제모습 찾기’의 큰 전기였다. 견고하게 지어졌고 건축적으로는 보존 가치가 있는 건물이나, 그 위치와 상징성이 너무 중대하여 철거 외에 다른 선택지를 생각하기 어려웠다고 본다. 이전하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지만 그 정도 규모의 건물을 이전 후 재건축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이전에 드는 막대한 예산과 공수를 뒷받침할 명분을 얻지 못한 총독부 청사는 완전히 철거되어 사라졌고 테마파크 정문 같았던 광화문도 청사 앞을 장식하는 초라한 모습에서 벗어나 한층 기를 얻었다.
최근 광화문은 월대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월대는 주요 궁궐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고 평평한 기단을 말하는데, 광화문 앞에 있던 월대는 조선 건국 초부터 있던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 집권한 흥선대원군이 1860년대 중후반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만들었다. 발굴 조사 결과 월대 높이는 약 70cm, 기단은 장대석을 2단으로 쌓아 올려 만들었고 가장자리에는 3단의 계단석을 두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사진을 보면 좌우의 화려한 난간 디자인도 눈에 띈다. 이 월대는 일제강점기 들어오면서 노면전차 선로 설치를 위해 철거됐다.
그런데 이 월대 복원을 둘러싸고 부정적인 기류가 높다. 조선 초에도 없었던 것을 굳이 복원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비난 입장을 요약하면 ‘현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입장에서 실익이 없는 시설을 단지 조선왕조의 흔적 복원이라는 명분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며 만들어야 하는가’ 라는 관점이 가장 커 보인다. 월대는 과연 도로 선형을 바꾸면서까지 이 넓은 공간을 점유할 가치가 있는 시설일까.
공사 중인 광화문 앞을 지나면 월대의 면적만큼 거리를 두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광화문의 모습이 보인다. 바로 앞 공간으로 차량이 지나다닐 때와 느낌이 많이 다르다. 잇따른 복원에도 권위를 찾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앉아 있던 광화문이 이제야 수직적 흐름이 강조된 맞은편 정부서울청사 건물과 팽팽한 균형을 이루는 미적 ‘기’를 갖춘 것 같다. 원활한 교통 흐름은 도시 디자인의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문화유산을 그냥 ‘갖다 놓는’ 수준이 아니라 터와 연계되어 단단하게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보는 사람의 뇌리에 깊게 자리 잡는다는 면에서 장기적으로 유리하다.
광화문을 없앤다면 월대도 없애고, 기왕 광화문을 수도 서울의 정문으로 두겠다면 월대도 복원하는 것이 맞아 보인다. 좌우로 길고 위로도 솟은 광화문에 필요했던 마지막 퍼즐은 제 3의 축인 앞뒤 공간이었던 것이다. 복원된 광화문 월대는 검은 바탕에 금박 글씨로 된 새 도안의 현판과 함께 올 10월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한동훈 서체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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