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트콤 ‘원 데이 앳 어 타임’의 에피소드 중 퇴역군인인 주인공이 치료예약을 잡기 위해 보훈부 담당자와의 연결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전화를 붙잡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누군가와 연결되면 담당자와 직접 통화해야 한다며 다시 ‘기다리라’ 하고, 다음에 연결된 이는 이미 2달 전에 보낸 의사 소견서를 자신에게 팩스로 다시 보내면 ‘검토’하겠다고 답한다. 마침내 연결된 담당자는 퇴근 시간 5분 전 이라며 월요일에 다시 전화하라고 한다. 결국 주인공은 당신들의 ‘미친 절차(insane process)’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퇴역군인들이 치료 시기를 놓치고 있는데 그깟 절차와 퇴근 시간이 중요하냐며 격분한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상황이다. 여기에서 저기로 여러 차례 전화가 연결되지만, 누구 하나 속 시원히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고 겨우 연결된 이후에는 ‘절차’가 어떻고, ‘규칙’이 어떻고 하는 설명을 처음부터 다시 듣느라 속된 말로 ‘뚜껑 열리는 경험’ 말이다. 그런데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뚜껑이 열리고 속에서 천불이 날지라도 인사담당자라면 ‘절차’를 목숨 걸고 준수해야 하는 일도 있다. 바로 사내 징계이다.
징계에도 절차가 있다. 회사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단순하게 보면 조사 -> 징계위원회 개최 -> 최종확정 및 결과 통보의 3단계이다. 때에 따라서는 재심위원회도 개최한다. 어느 정도 규모나 체계를 갖춘 회사라면 사내 징계 절차를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에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는데 꼭 그렇지 않더라도 위의 3단계를 얼마나 꼼꼼히 밟아가느냐에 따라 외부에서 제삼자의 시각으로 봤을 때도 사내 징계가 합리적이고 공정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때문에 하자 없이 징계 절차를 진행하는 것은 인사담당자의 가장 큰 숙제다.
조사 단계에서는 징계혐의자와 이해관계자들과 문답을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한다. 징계 혐의는 구체적으로 특정되어야 하고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사용자인 회사의 역할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면담 과정에서 과도하게 선입관을 갖고 임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인사담당자는 경찰도, 검사도, 특별사법경찰관도 아니다. 그저 어쩌다 보니 그 일을 담당하는, 본인 또한 근로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간혹 사용자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 그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과 그릇된 의협심으로 무리하게 조사를 진행하고 일방적으로 절차를 진행하는 경우가 있다. 아는 후배 한 명은 실제 이런 사유로 개인 소송에 휘말려 있다. 인사담당자는 사용자와 근로자 사이에서 최대한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메신저’로서 자기 역할만 충실히 하면 된다. 지금 맡은 일은 어디까지나 일일 뿐 내가 아니다. 일보다는 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사가 끝나면 이를 바탕으로 사용자가 징계위원회 개최와 근로자 징계를 요구한다. 징계위원회 개최 시 가장 주의할 것 세 가지는 위원회 구성, 근로자 출석 통보 및 소명 기회 부여, 노동조합 협의/합의 여부(단체협상이 있다는 전제하에)이다. 여기에서 소위 말하는 ‘절차상 하자’가 많이 발생한다. 징계권은 회사를 경영하기 위한 사용자 고유의 인사권이니 마음대로 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에 근로자 측 대표를 위원으로 참석시켜야 한다든지, 노사 동수로 위원을 구성한다든지, 징계사유와 직접 관계가 있거나 혐의자와 이해관계가 있는 자는 기피(회피)하도록 적혀 있는데 이를 따르지 않으면 외부에서는 무조건 ‘절차 위반’이 된다. 또한 징계대상자에게 구체적인 징계사유를 정확히 전달하여 자신을 방어하고 소명할 수 있도록 충분히 기회를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과정 중 하나이다.
‘절차의 정당성’이라는 문턱을 넘지 못하고 처분이 무효화 되는 사례를 살펴보면 가끔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사소하다. 얼굴과 엉덩이를 어루만지고 부적절한 말을 일삼는 등 여직원들을 오랜 기간 성희롱·성추행한 A 팀장은 명징한 징계사유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충분한 소명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처분이 무효화 되었다. 징계위원회에 출석은 시켰는데 행위의 정도가 지나치고 증거자료도 너무 명확하다 보니 본인에게 직접 의견을 물어봐야 회의만 길어지고 시간 낭비라며 위원회가 소명 과정을 생략해 버린 것이 패착이었다.
실무자 차원에서 이런 구멍을 발견하면 즉시 바로 잡아야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는 걸 막을 수 있다. 절차상 재심 제도가 있다면 재심 과정에서라도 ‘충분한 소명 기회 부여’, ‘적법한 위원회 구성’을 통해 하자를 치유해야 한다. 절차 하자는 노무 대리인들이 제일 쉽게 접근하는 필승전략이기 때문에 의뢰인에게 아예 재심청구 자체를 하지 않도록 권하기도 하니 세심히 살펴봐야 한다.
특히나 성 비위, 직장 내 괴롭힘 등 사내에 명백한 ‘피해자’가 존재하는 징계 건이라면 더욱 그렇다. 모멸감과 수치심, 정신적 고통을 참고 참다가 겨우 용기 내 신고하고 지루하고 험난한 과정을 거친 끝에 겨우 자신의 삶을 추스르고 있을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의 업무 복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일 것이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내 징계 절차를 준수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것이 근로자를 보호하고(징계대상자가 되었든 피해자가 되었든), 좋든 싫든 꾸역꾸역 이 일을 하는 나 자신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회사를 보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 김진은?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을 합쳐 3000명에 달하는 기업의 인사팀장을 맡고 있다. 6년간 각종 인사 실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비법을 ‘알아두면 쓸데있는 인사 잡학사전’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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