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나는 지금 제주에 있다. 며칠 전에는 무주에 있었고, 또 며칠 전에는 태국에 있었다. 그러려고 작정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미치광이 여행자가 되어 버렸다.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 오프닝에는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출몰한, 갑자기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직장도, 가정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잊은 채 여행에 빠져드는 이 사람들의 증세는 ‘둔주’ ‘보행성 자동증’ ‘방랑벽’ 등으로 불렸고, 길을 떠난 이들은 ‘미치광이 여행자’로 불렀다 한다. 박하경(이나영)은 묻는다. ‘그들은 과연 미쳐서 여행을 떠난 걸까? 그대로 살다가는 미쳐 버릴 거 같아서 떠난 게 아닐까?’라고.
‘박하경 여행기’는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일하는 박하경이 토요일 딱 하루 떠나는 여행기를 담아낸다.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 떠나는 딱 하루의 여행이 콘셉트로, ‘걷고, 먹고, 멍 때릴 수 있다면’ 어디든 좋다는 취지다. 전남 해남부터 군산, 부산, 속초, 대전, 서울, 제주, 경주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지만, 엄밀히 말하면 박하경의 여행은 우리가 알던 여행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자신만의 목적은 있지만 무얼 꼭 보고 경험하겠다는 특별한 목적이 없을 때가 많고, 어지간하면 숙박하지 않고 당일치기로 떠난다. 남도 끝자락에 위치한 해남 미황사에 템플스테이를 신청해 놓고 ‘스테이’는 하지 않는 식이다. 게다가 동행도 없이 훌쩍 혼자 떠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어찌 보면 이게 여행인가 싶을 만큼 단조롭고 밋밋해 보이는 여행이지만, 박하경의 여행은 제법 재미지고, 소소한 박진감이 넘친다. 그건 박하경이 짧은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면면, 그리고 그들로 인해 빚어지는 여행의 의외성 때문이다. 반나절 남짓한 일정의 템플스테이에 불과하건만 주지스님과 차담을 즐기는 와중 천연덕스럽게 방귀를 뀌는 소설가(서현우)를 만나고, 묵언 수행 중인 보살(선우정아)과 멋진 풍경을 즐기며 짧은 교감을 나눈다.
옛 제자 김연주(한예리)의 전시를 보러 군산에 가서 여전히 담담한 응원을 보내고, 부산국제영화제와 밀면의 도시 부산에서 운명인가 싶을 만큼 자주 마주치며 설렘을 유발하는 남자(구교환)을 만나 원칙을 저버리고(!) 1박을 한다. ‘노잼도시’ 인상이 강한 대전에서 자신의 10대 시절을 지배할 만큼 좋아했던 만화가 구영숙(길해연)과 우연히 식당 합석을 하고, 빵집 순례를 목표로 간 제주에서는 ‘달팽이빵’을 찾아 나서는 꼬마아이의 뒤를 쫓으며 예정과 다른 빵을 사는 식이다.
물론 모든 여행의 과정이,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이 좋은 건 아니다. 때로는 버스터미널에서 만난 ‘꼰대’ 할아버지(박인환)와 언성을 높이며 설전을 벌이기도 하고, 주말에도 학교 문제로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 대는 학부모와 부장교사를 피해 동네 인근의 국립기상박물관에 왔다가 카드를 잃어버려 그곳에서 만난 동료 교사(조현철)에게 겸연쩍게 돈을 빌리기도 한다. 여행 또한 현실의 일부분이고, 현실과 완전히 괴리될 수 없음을, ‘박하경 여행기’는 힘주지 않고 편안하게 보여주는 식이다.
이나영은 배우 본연의 이미지를 100% 활용하면서 박하경이란 인물을 완성해낸다. 영화 ‘아는 여자’의 이연,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전경과 ‘아일랜드’의 이중아로 이나영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박하경 여행기’의 박하경은 이나영 커리어에서 또 다른 인생 캐릭터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이나영이란 주연배우를 제외하고 다른 인물들은 모두 여행지에서 만나는 인물들이라 에피소드별로 특별 출연하는 형식.
서현우, 한예리, 구교환, 박인환, 길해연, 조현철, 심은경 등 짧은 분량임에도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배우들이 등장해, 연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박하경과 ‘썸’을 타며 설렘을 선사하는 구교환과 마지막 여행지 경주에서 소환되는 고등학교 단짝 친구 역의 심은경은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릴 만하다. 대사는 딱 한 마디뿐이었지만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가수 선우정아도 반갑다.
‘박하경 여행기’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이종필 감독과 손미 작가가 다시 손잡은 작품으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느껴졌던 인간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물씬 느껴지는 작품이다. 편당 25분 남짓의 짧은 분량으로 구성된 8부작 드라마라 박하경처럼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싶지만 여의치 않을 때 한 편씩 부담없이 즐기기 좋다. 벌써부터 시즌2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생길 지경.
‘여행기’라 명명했으나 여행에 대한 강박이나 과시가 없으니 피곤하지도 않다. ‘박하경 여행기’에서 박하경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이렇다. ‘나는 여전히 여행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단히 재밌지도 의미 있지도 않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간혹 어떤 순간을 실감하는 게 다다. 그래서 즐겁다.’
인생이 힘들고 쓰라려서 미쳐 버리고 싶을 때, 박하경처럼 딱 하루라도 괜찮으니 떠나보자. 걷고, 먹고, 멍 때릴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좋으니까. 또 아는가, 낯선 곳에서 박하경이 김연주에게 했듯 “으라파 라구라구!”라고 응원의 메시지를 던져줄 사람을 만날지(2화 참조), 인생 처음으로 스텝이 꼬여도 어색하게 춤을 추게 될지(5화 참조) 모를 일이니까.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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