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회사 내의 성희롱, 괴롭힘, 금품수수 등의 불법행위에 대한 조사는 대부분 내외부 고발자의 고발에 의해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감사팀이나 인사팀 메일, 익명 게시판 등 각종 채널을 통해 별별 민원이나 고발이 다 들어온다.
민원인 본인은 둘째치고 고발대상자의 신분조차 식별하기 어려운 내용도 많고, 어디서 들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카더라 통신이나 승진이나 인사평가 시즌에는 개인의 신세 한탄 같은 내용도 ‘익명 투서’라는 탈을 쓰고 들어온다. 모든 투서에 일일이 사실확인을 진행할 여력도 시간도 없는 상황이라 구체적이고 정확한 상황을 특정하기 어렵거나 아예 말이 안 되는 내용이면 중요도 ‘하’로 분류하여 상황을 좀 더 지켜보는 편이다.
작년 이맘때쯤 직원 U가 고객의 사적정보를 포함한 중요 회사기밀을 유출하고 있다는 내용의 익명 투서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고발대상자도 없이 횡설수설하는 내용에 불과했던 내용이 두 번째 투서에서는 좀 더 구체화되었다. 피고발직원 U의 소속 부서 특성상 업무처리 과정에서 민감정보를 많이 접할 수밖에 없다는 점, 그 내용이 쉽게 공유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민원인(고발자)을 U가 위협한 날짜와 이로 인해 경찰이 출동했던 상황 등이 꽤 자세히 적혀 있었다.
직원 간 다툼으로 경찰까지 출동했다 하는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을까 싶어 우선 해당 직원의 직속상사, 차상급자와 면담을 진행했다. 직원 간의 불화나 내부적인 문제가 있었는지 묻는 말에 둘 다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너무 무능하여 내부 사정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고의로 숨길만한 위인들도 아니었고 그럴만한 일조차 없었다며 오히려 매우 뜬금없다는 표정이었다. 직원 U에 대해서는 업무능력도 출중할뿐더러 책임감 있고 성실한 직원이라며 평가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다만 최근에 개인적인 문제가 있어서 교대 근무가 없는 부서로 전출을 신청한 상태였다고 했다.
마침 주간근무중이던 U와도 바로 면담을 진행했다. 고객정보 유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으로 일관하던 U는 특정일에 경찰이 출동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르러서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U는 지난해 동료직원 S와 6개월쯤 사내 연애를 하다가 헤어졌다. 이후 S는 U에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의 문자와 전화폭탄을 보내며 자신과 다시 만나 줄 것을 강요했다. 급기야 사건이 벌어진 날, 야간근무를 마치고 귀가한 U의 오피스텔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흉기를 휘두르며 자해소동을 벌였고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U는 S에 대해 스토킹 신고를 하고 접근금지 신청과 무단침입에 대한 수사를 요청했는데 그는 해당 사건이 벌어지기 얼마 전에 이미 퇴사한 상태였다.
U의 담당업무와 근무환경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S는 과거 연인시절 나누었던 대화를 바탕으로 U가 고객정보를 유출하고 있다는 식의 시나리오를 쓴 것은 물론, U의 집에 침입하여 손목을 긋고 위협한 일에 대해서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양 둔갑시켰던 것이다. 허무맹랑한 거짓말에 속아 눈 뜨고 코 베인 상황은 둘째치고 같은 여성 근로자로서 U의 신변이 심히 걱정스러웠다.
앞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직원 개인이 겪는 위협이나 스토킹 행위, 허위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 등에 대해 회사가 얼마큼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만한 가이드라인이 없다. 근로기준법과 산업안전보건법상 직원에 대한 안전보호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개인의 사적 영역까지 모두 보호할 수도 없고, 사람마다 생각하는 보호의 범주도 다르다 보니 섣불리 개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때는 소속 직원이었다 하더라도 이미 퇴사한 S를 대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일단 부서장과 상의하여 U를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다른 부서로 전보하기로 하고 그전까지 야간근무를 최소화하기로 했다. 또한 회사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었기에 사업장 관할 경찰서에도 따로 주의보호를 요청해 두었다. 이후 얼마간 동일인의 소행으로 보이는 투서가 반복해서 들어왔으나 이도 차츰 뜸해졌다. 지난해 가을 신당역 역무원 스토킹 살인사건으로 세상이 한창 떠들썩할 즈음 U에게 사내 메신저로 안부를 물었더니 다행히 별일 없이 잘 지낸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울러 뉴스를 보면서 남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출퇴근길이 무섭고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지난 21일 발간한 ‘2022년 여성폭력 초기지원 현황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여성긴급전화 1336센터로 접수된 스토킹 피해상담 건수가 2021년 대비 50%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에 발의된 지 22년 만인 2021년 10월에서야 힘들게 시행된 스토킹 처벌법 덕분일 수도 있고 일련의 사건·사고로 인해 스토킹을 위험한 범죄행위로 보는 인식이 많아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해당 보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해자 유형이 과거 또는 현재의 연인, 배우자나 직장동료 등 아는 사람인 경우가 무려 90%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더 세부적으로는 직장 동료인 경우가 12%, 업무와 관련하여 알게 된 사이가 12%이다. 그뿐만 아니라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접수된 직장 내 젠더폭력 관련 제보의 20%가 스토킹이라는 자료를 보더라도 과도한 구애행위를 아직도 로맨틱한 연애사건으로 보거나, 상대의 거절 의사를 소위 '튕기는 것'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하는 아둔한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직장 내 스토킹이 정말 무서운 것은 U의 사례에서처럼 가해자가 마음만 먹으면 피해자의 주소와 연락처, 심지어 교대 근무표와 같은 정보를 사내 인트라넷을 통하거나 전화 몇 통만으로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 가해자를 욕하고 피해자의 편에 설 수 있는 외부사건과 달리 가해자 또한 한 직장에 소속된 동료이기에 누군가는 ‘그 사람이 그럴 리 없어’ 라거나, ‘정말 좋아하면 그럴 수도 있지’와 같은 옹호의 말을 뱉거나 잘못된 사실을 유포함으로써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가하고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더 많은 고발과 신고 민원으로 할 일은 배가 되고 그만큼 스트레스도 받겠지만 직장 내 성희롱과 같이 직장 내 스토킹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회사가 개입하고 조치 및 예방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도 무탈하게 안전한 귀가를 꿈꾸는 많은 여성 근로자를 위해서 말이다.
필자 김진은?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을 합쳐 3000명에 달하는 기업의 인사팀장을 맡고 있다. 6년간 각종 인사 실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비법을 ‘알아두면 쓸데있는 인사 잡학사전’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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