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영화 ‘친절한 금자씨’, ‘추격자’, ‘하녀’, 예능 ‘무한도전’, ‘대탈출’, 드라마 ‘스위트홈’… 이곳에 모두 등장하는 한 장소가 있다. 서울 중구 회현동에 위치한 제2시민아파트다. 콘크리트 골조에 붉은 벽돌로 벽을 쌓아 올린 이 아파트는 올해로 준공 54년 차를 맞는다. 세월이 느껴지는 낡은 외관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내부에 아직까지도 많은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이다.
이 아파트에 ‘시범’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얽혀 있다. 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30분께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중턱에 위치해 있던 시민아파트 한 동이 무너져 내렸다. 아파트 주민 32명이 희생되고 38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고 원인으로 철근, 시멘트 등의 건설자재가 제대로 사용되지 않은 점과 무리한 공사 기간 단축 등이 지목됐고, 이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는 부실 공사의 대명사가 됐다. 김현옥 당시 서울 시장은 같은 해 5월 28일 준공된 이 곳을 보고 “모든 아파트는 이곳을 시범 삼아 튼튼히 지으라”고 지시했고, 아파트는 ‘시범아파트’가 됐다.
서울 남산 자락의 이 아파트는 올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서울시는 2022년 11월 아파트의 철거 방안을 확정하고 주민보상 절차를 시작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시는 아파트가 D등급 재난위험 시설물로 지정된 만큼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철거를 진행한다는 입장이다. 아파트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달부터 입주민들의 보상 신청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일부 입주민의 이주거부가 이어지면서 서울시와 입주민 간 갈등이 장기화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아파트 내·외부, 세월 흔적 고스란히 유지
17일 방문한 회현시범아파트 입구에는 철거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현수막에는 ‘서울시는 5억에 상당하는 회현시범아파트를 1억 7000~8000만 원 보상이 웬말이냐. 즉시 철회하고 호가로 보상하라’는 요구와 ‘서울시는 SH공사를 내세워 회현시범아파트 저가보상을 철회하고 시장 원리에 맞는 보상을 하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겨울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출입문에는 동파 대비 안내문이 붙어 있기도 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방문해 소란을 피우는 외부인을 막기 위한 외부인 출입금지 안내문도 보였다. 평소 외부인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지 복도에서 마주친 입주민은 기자임을 밝히기 전까지 적대감을 보이기도 했다.
아파트 내부는 오후 2시임에도 불구하고 어둠이 깔려 있었다. 띄엄띄엄 나 있는 창을 통해 발걸음을 간신히 뗄 정도로 햇빛이 들어왔고, 인기척이 느껴지는 가구는 드물었다. 일부 가정에서 라디오 소리, 전화 소리, 텔레비전 소리 등이 새어 나왔고, 옥상에서 나는 바람 소리가 복도에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채 비어 있는 복도를 따라 걸으니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글자가 지워진 종이 신문, 먼지가 쌓인 우유 주머니, ‘착한 어린이는 낙서도 안 하고 휴지도 안 버립니다’라는 안내문 등이 있었다. 강남 재건축단지만큼 위례신도시·부산·과천 등 일부 지역의 아파트값이 급등하고 있다는 내용의 2016년도 기사가 벽에 붙어 있기도 했다. 위례신도시는 이 아파트의 이주보상이 진행되며 일부 입주민이 이사를 갔던 곳 중 한 곳이기도 하다.
비교적 최근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새로 페인트칠을 해 다른 나무 대문과 구분된 집 앞에는 쿠팡 배송 상품이 놓여 있었다. 배달음식 용기가 한 족발집의 비닐봉지에 담겨 있었고, 수건이 빨래 건조대 가득히 널려 있기도 했다.
아파트는 지하 1층부터 지상 10층까지의 규모로, 1개 동 352가구다. 시민아파트로 지어졌기에 엘리베이터는 없으나 6, 7층에서 각각 구름다리를 통해 외부에서의 진입이 가능하도록 했다. ㄷ자 아파트는 가운데 중정을 두고 있는데, 과거 주민들이 김장 등의 용도로 사용했던 장독대 등이 남아 있었다.
회현시범아파트는 다른 시민아파트에 비해 넓은 평수를 자랑한다. 거실과 방 두 개에 공급면적 54.14㎡(16.38평)·전용면적 36.36㎡(11평)으로 앞서 준공된 시민아파트(와우시민아파트)가 공급면적 36.36㎡(11평)·전용면적 9.9㎡(8평)인데 비해 널찍하다. 공중화장실이 아닌 개별화장실과 당시 최신식 기술이었던 중앙난방을 갖춘 점도 이 아파트의 특징으로 꼽힌다.
이 같은 장점에 당시 회현시범아파트는 높은 인기를 끌었고, 인근 남대문시장 상인들 외에 유명 정치인, 방송사 PD, 연예인 등이 이곳을 거주지로 택했다. 가수 윤수일 씨, 은방울자매 등이 이곳을 거쳐 간 것으로 전해진다.
#20년 가까이 ‘철거냐 리모델링이냐’
회현시범아파트는 2004년부터 철거 위기를 겪고 있다. 2004년 11월 진행된 정밀안전진단에서 아파트가 안전등급 D급(재난위험시설물)을 기록하자 서울시는 철거를 추진하며 주민들에게 보상금을 주고 이주를 시켰다.
그러나 2016년 서울시는 아파트를 철거가 아닌 리모델링을 하겠다며 방향을 틀었고, 4년이 지난 2020년 서울시는 아파트를 기존보다 100가구가량 줄인 253가구를 규모로 하는 ‘아트 빌리지’로 탈바꿈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아트 빌리지에는 청년 예술인을 위한 전시실과 공방 등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2022년 11월 서울시는 2023년 안으로 아파트를 철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최근 남은 가구를 대상으로 보상동의절차를 진행하고 있으나 보상문제 등으로 일부 주민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총 352가구 가운데 51가구가 아파트에 남아있다.
인근 한옥마을에서 거주한다는 한 50대 부부는 “이렇게 살아있는 역사를 없애려 한다니 말도 안 된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이런 건물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내부를 보완해서 박물관처럼 남겨두는 방안도 서울시가 고려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박용수 회현시범아파트 비상대책협의회 위원장은 서울시가 계속해서 계획을 바꾼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박 위원장은 “이번에 철거 계획을 밝히면서 안전 문제를 말하고 있는데, 불과 몇 년 전 아파트 리모델링 이야기가 나왔을 때 ‘건물이 50년이 넘어 가는데 리모델링이 가능하냐’고 오히려 주민 측에서 되물었었고, 당시 시에서는 가능하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리모델링이 계획돼 있어 굳이 집을 수리하지 않고 지냈던 분들이 많이 계신다. 그런 분들은 지금 거주 환경이 너무 열악한 상태”라면서 “겨울철에는 보일러, 동파 등의 문제로 가족 집이나 다른 곳에서 계시다가 오시는 분들도 계신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그동안 보상을 받고 나가신 분들도 ‘이 정도면 좋다’라는 마음으로 나가신 게 아니라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것 같다’라는 생각으로 나가신 것”이라며 “리모델링인지 철거인지를 두고 20년 가까이 지나다 보니까 이전에 50대이셨던 분들이 이제는 70대다. 그분들은 분양권을 받아도 들어가서 살 때가 되면 80이 넘어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서울시는 지난 3월 철거에 반대하는 일부 입주민들의 이주 거부가 이어지면서 입주민과의 갈등이 장기화되고 있다는 한 언론보도와 관련 “2022년 상반기 주민설문조사 시 51세대 중 36세대가 보상에 동의했으며, 나머지 주민들도 감정평가 후 보상동의 여부를 재검토하는 등 대부분의 주민들이 보상협의에 참여의사를 가지고 있다. 난항을 겪고 있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김초영
인턴기자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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