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대기업에 아이디어와 기술을 뺏긴 중소기업 대표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대기업과 투자·협업을 논의하면서 기술 정보를 제공한 이후 대기업이 유사한 아이템을 출시하는 일을 겪었다. 속수무책으로 사업 아이템을 빼앗겨 회사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졌다. 이들은 “피해기업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가 필요하다”라고 호소했다.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건물에서 알고케어·프링커코리아·키우소·닥터다이어리·팍스모네 등 5개 기업 대표가 모여 ‘대기업 아이디어 탈취 피해기업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모두 대기업에 아이디어·기술을 탈취 당해 분쟁 중이다. 이날 기자회견은 아이디어, 저작권, 기술 분야에서 권리 탈취를 당한 중소기업에 법률 자문을 지원하는 재단법인 경청에서 주최했다.
기술의 발달로 신산업이 우후죽순 등장하면서 기술 탈취 등을 다룬 부정경쟁법도 여러 차례 개정됐다(관련 기사 [알쓸비법] 대기업은 뭘 믿고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를 훔칠까). 2018년에는 아이디어 침해(차목)가 부정경쟁 행위로 규정돼 위반 시 손해배상이 가능해졌고, 2022년에는 데이터를 부정하게 취득·사용하는 경우(카목)도 부정경쟁 행위로 명시됐다.
하지만 부정경쟁 행위가 인정돼도 실질적인 처벌로 이어지진 않는다. 아이디어 침해, 데이터 부정 사용은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된다. 성과물 침해는 행정조사조차 이뤄지지 않는다. 박희경 재단법인 경청 변호사는 “시정 권고 외에 시정명령이 가능한 구조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라며 “아이디어 침해, 데이터 부정 사용, 성과물 침해는 위법성의 정도와 사회적 책임의 무게를 생각하면 결코 약한 행위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분쟁 발생 시 피해 입증부터 대책 마련까지의 과정도 스타트업이 감당하기 어렵다. 박 변호사는 “행정조사 및 수사기관에서 공동 대응하는 상설 협의체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라며 “관련 분쟁이 발생하면 스타트업은 어디에 무슨 명목으로 신고할지 첫 단계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잘못 신고하면 무혐의 처분이 나오고, 민사소송에도 불리하게 작용한다”라고 설명했다.
박 변호사는 또 “아이디어는 기술보다 약하게 보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대사회에서는 기술과 아이디어의 경계가 모호하다. 아이디어의 정당한 가치를 반영한 평가가 필요하다”라며 “유형물의 침해보다 사업 아이디어, 기술 등 무형물의 침해로 인한 피해가 더 크다. 합리적인 수준의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라고 짚었다.
이날 5개 스타트업 대표는 피해 사례를 밝히고 가해 기업의 수법과 대응의 어려움을 전했다. 사물인터넷(IoT) 기기를 기반으로 영양관리 솔루션을 제공하는 업체 알고케어는 올 초 롯데헬스케어와의 분쟁으로 대중에 알려졌다. 알고케어는 2021년 9월 롯데헬스케어와 개인 맞춤형 영양제 공급기를 두고 투자 논의를 하다가 결렬됐는데, 지난 1월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2023에서 롯데헬스케어가 알고케어와 유사한 영양제 공급기를 선보이면서 분쟁이 격화했다.
변호사 출신의 정지원 알고케어 대표는 피해기업이 겪는 어려움을 알렸다. 정 대표는 “대기업은 협업을 제안하며 ‘같은 서비스를 하지 않겠다’고 안심시킨다. 하지만 나중에는 ‘왜 개발하면 안 되나’라며 말을 바꾼다”라고 분노했다.
그는 “탈취 사건을 겪는 스타트업 대표는 패닉이 온다. 피해 입증도 어렵다. 증거는 가해 기업이 가지고 있는데, 피해 기업이 찾아 제시해야 한다. 중기부에서 대응 절차를 원스톱으로 안내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며 “스타트업은 대기업의 협업 제의가 들어오면 거절하지 못한다. 그들이 요구하는 정보를 제공하고 그 과정에서 문서뿐만 아니라 구두로도 많이 전달한다. 이건 입증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대기업이 기술 탈취 후 해외 사례를 가져와 반박하는 수법도 지적했다. 그는 “우리 제품을 보고 출시했지만 나중에 문제가 되면 비슷한 해외 기술이나 이미 사장된 서비스를 들고 와서 ‘새로운 것이 아니므로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라며 “부정경쟁방지법이 개정된 이후 실제로 시정 권고까지 이어진 사건은 10건도 안 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라고 역설했다.
되레 가해 기업에 고소 당한 업체도 있다. 세계 최초로 화장품 잉크를 사용해 타투 프린터를 개발한 프링커코리아는 CES 2022·2023에서 수상하는 등 해외 시장에도 알려진 업체다. 프링커코리아는 2019년 LG생활건강과 기기 공급 및 협업을 논의했으나 무산됐다. 지난 2월 LG생활건강이 MWC(모바일 월드 콩그레스) 2023에서 비슷한 제품을 출시하자 프링커코리아도 대응에 나섰다.
윤태식 프링커코리아 대표는 “최근 가해 기업으로부터 명예훼손, 업무방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먼저 형사고발을 당했다. 그런데 우리가 형사고발을 하자니 적용할 법을 찾기가 정말 힘들다. 실효성이 없는 공정거래법으로 고발해봤자 역풍을 맞을 것 같아 선뜻 나서지 못했다”라며 “대기업의 ESG 경영이 최근 화두인데, 스타트업의 아이디어 및 기술 탈취가 과연 ESG 경영에 맞는지 묻고 싶다”라고 반문했다.
혈당 관리 플랫폼을 출시한 닥터다이어리도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지적했다. 닥터다이어리는 2020~2022년 카카오 계열사와 접촉하며 사업 모델, 사업 계획 등의 정보를 제공했는데, 지난 3월 카카오헬스케어가 비슷한 사업을 발표했다. 닥터다이어리 측이 내용증명을 보냈지만, 카카오헬스케어는 탈취 의혹을 부인했다.
송재윤 닥터다이어리 대표는 “그동안 카카오는 신규 사업으로 시장에 진출하면서 기존 사업자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김범수 의장은 신규 사업에 신중하게 진출하고 계열사도 정리하겠다고 밝혔지만, 지난 1분기에만 벤처기업과 카카오의 분쟁이 3건이나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 IT 분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카카오가 이 같은 부당한 방법으로 시장에 진입한다면 우리 같은 벤처기업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라며 대기업의 자성을 요구했다.
공모전에 낸 아이디어를 뺏긴 경우도 있다. 방성보 키우소 대표는 개발 기간 9년, 비용 5억 원 이상을 투입해 ‘키우소’라는 목장 기록 관리 플랫폼을 만들었다. 키우소는 2020년 12월 농협 주최의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런데 2022년 농협경제지주 축산경제(옛 축협중앙회)가 ‘NH하나로목장’이라는 비슷한 목장 관리 플랫폼을 출시하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키우소는 농협경제지주 축산경제에 법률 의견서를 전달했지만 회사 측이 이에 대응하지 않아 아직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방 대표는 “농축산 업계에서 가장 큰 기업이 조합원의 서비스를 베끼면 누가 개발에 나서겠나. 농협경제지주는 정당한 협업 절차를 거치거나 앱 개발을 중단하길 바란다”라며 “드러나지 않았을 뿐 수많은 스타트업이 비슷한 일을 겪는다. 대기업을 상대할 방법은 고소밖에 없는데, 고소도 대형 로펌을 앞세운 대기업에 유리한 제도다. 하루빨리 스타트업을 위한 제도가 생기길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방 대표의 말처럼 피해기업이 법적으로 보상을 받는 방법은 민사소송이지만, 승소하기 어려울뿐더러 설령 승소해도 ‘상처뿐인 승리’라는 점도 문제다. 박희경 변호사는 “민사소송에서 피해 기업은 증거 수집, 입증책임, 손해배상 기초 산정의 어려움을 겪는다”라며 “중소기업인 피해업체가 손해액을 정확히 산정하기 어렵고, 너무 적게 산정돼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있어도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기술 특허를 내도 중소기업은 대응이 어렵다는 주장도 나왔다. 신용카드 기반의 개인 간 지불결제 시스템을 개발한 핀테크 업체 팍스모네는 신한카드 등과 수년에 걸쳐 기술 탈취 분쟁을 벌였다. 홍성남 팍스모네 대표는 “우리는 (법정 다툼에서) 특허 등록도 있고 이에 근거한 기술 분석까지 제출해도 인정받지 못했다. 대기업은 애초에 특허 보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온다”라며 “국내에서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의 특허는 있으나마나 한 취급을 받는다. 아이디어만 들고 싸우는 기업은 얼마나 어렵겠나”라고 우려했다.
따라서 제도 개선이 매우 중요하다. 박희경 변호사는 “미국에는 소송 전에 양측이 가진 증거를 모두 공개하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있다. 이를 통해 실체가 어느 정도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선 수사기관이 확보한 증거를 피해 기업이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슷한 제도가 필요하다”라며 “아이디어와 성과물 침해는 피해를 입증한 승소 판례가 많지 않다. 가해 기업은 과거의 반대 판례를 가져와 대응하고 있다. 앞으로 피해 기업이 승소해 판례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심지영 기자
jyshim@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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