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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대학 과제를 인공지능으로 해오라고 했더니 벌어진 일

폭넓은 배경 지식과 창의력이 결과물의 수준 결정…인공지능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 요구

2023.04.11(Tue) 14:14:29

[비즈한국] 불과 한 달 사이에 20년 전 공상과학 영화에서 보던 미래가 성큼 다가왔다. 생성형 인공지능 GPT-4 기반의 ‘챗GPT(Chat-GPT)’의 등장으로 인해서다. 지금까지 인공지능은 하나의 시도나 실험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거대한 변화가 각종 분야에서 감지된다. ​알파고의 등장 이후 바둑계의 판도 자체가 달라진 것처럼 말이다. ​대학도 그 중 한 곳이다.

 

대학에서는 수업을 마치고 과제를 내준다.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인터넷 검색이 더해졌다. 다만 검색을 통해 과제로 제출하기 적당한 글을 찾아도 그것을 그대로 베끼긴 어렵다. 마찬가지로 검색을 통해 표절 여부를 쉽게 판별하기 때문이다.

 

지난 3월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전공 수업 응용기호학 강의에서는 학생들이 인공지능을 활용한 과제를 차례대로 발표했다. 사진=봉성창 기자

 

인공지능은 다르다. 같은 질문을 100번 던져도 100번 모두 조금씩 다른 문장과 구조로 답을 낸다. 그렇게 인공지능이 만들어 준 과제를 과연 교수가 구별할 수 있을까. 

 

똑같이 인공지능 기술이 더해진 판별기라도 만들어진다면 모를까, 당장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대학이 취업을 위한 학점 따기용으로 여겨지고 표절에 대한 윤리 의식이 희박한 우리나라에선 학생들의 인공지능의 악용을 막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지난 3월 21일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전공 수업인 ‘응용기호학’ 강의에서는 흥미로운 실험이 진행됐다. 수업을 맡고 있는 최장순 겸임교수가 학생들에게 ‘기호란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로 창작물을 만들어오라는 과제를 내준 것. 단, 모든 과정에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을 반드시 활용할 것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금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100% 활용을 주문했을 때 과연 학생들은 어떤 결과물을 제출했을까. 직접 수업을 참관해 그 결과를 지켜봤다.

 

#“창작물을 제출할 것,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이날 과제를 하는 가장 간단한 과정은 이렇다. 가장 대표적인 학습형 인공지능인 챗GPT에 ‘기호란 무엇인가’를 질문한 다음 그 대답을 주제로 창작물, 가령 ‘시’를 써달라고 다시 요청한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을 과제로 제출하면 된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그럴싸한 시가 한 편 완성된다.

 

기호들의 춤

 

기호들이 속삭여오는 이 세상의 언어,

그들은 사색에 착륙해, 그림자를 던진다.

묵직한 과거와 미래, 흩날리는 꿈들 속,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물결 위에.

 

문자와 상징들로 이루어진 그림자,

무수한 이야기들을 간직한 채,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기며

깊은 생각의 무지개를 그린다.

 

철저히 변화무쌍한 기호의 향연,

그 안에서 찾아낸 사랑과 고통,

행복과 슬픔이 얽히며 공존하는

무한한 세계의 질문들.

 

기호들이 떠올리는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그 가운데 깨닫게 되는 것은

기호의 세계가 만들어낸 놀라운 현실.

 

인간이 창조한 무수한 기호들,

그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춤을 추며,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는 영원한 스승.

 

이렇게 불과 30초 만에 과제가 끝나지만, 학점을 두고 경쟁하는 대학 풍토상 이렇게 과제를 제출하면 좋은 학점을 보장받기 어렵다. 뭔가 ‘비틀기’가 필요하다.

 

가장 먼저 보인 차별화 지점은 “기호가 무엇인가 대놓고 묻지 않는 것”이다. 기호학에서 기호의 정의는 이미 많은 학자들을 통해 내려져 있고, 인공지능은 이미 이러한 수많은 학술 자료를 학습해서 근접한 정답을 가지고 있다. 한 학생은 “기호가 없는 세상을 묘사해달라”는 질문을 던져 눈길을 끌었다. ‘부존재’에 대한 답을 끌어냄으로써 존재에 다가가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챗GPT에 다양하고 반복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기호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각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사진=고려대 19학번 권은재 제공

 

기호를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수준에 맞게 정의해달라고 하거나, 이미 알고 있는 기호학 지식을 바탕으로 인공지능과 치열하게 토론하는 과정을 제출한 학생도 있었다. 응용기호학 수업인 만큼 기호학의 기본적 정의를 어느 정도 이해한 학생들이 인공지능에 질문을 던지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학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 단계는 이렇게 도출된 기호의 정의를 가지고 창작물을 만드는 일이다. 대표적인 인공지능 서비스인 챗GPT는 단일 채팅창에서 대화한 내용을 모두 참고해서 다음 내용을 만든다. 앞서 나눈 내용을 바탕으로 시나 소설을 지어달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써달라고 하거나 혹은 추가 요청을 통해 새롭게 창작할 수도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수박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수박을 그리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수박이 아니다. 사진=고려대 22학번 정진우 제공

 

이미지를 생성하는 인공지능 서비스를 활용해 이미지를 만든 학생도 여럿 있었다. 한 학생은 ‘미드저니’를 활용해 수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수박을 그렸다. 우선 챗GPT로 수박의 외적인 특성을 알려달라고 한 다음, 그 결과를 미드저니에 입력했다. 그렇게 탄생한 이미지는 수박을 닮았지만, 결코 수박이라고 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다. 해당 학생은 “우리는 ‘수박’이라는 단어 하나만 들어도 인공지능보다 훨씬 정확한 수박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며 “기호란 다양한 의미를 포괄하고 의미의 합을 넘어서 하나의 실체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란 근사한 결론을 냈다.

 

#인공지능이 제시한 새로운 교육의 가능성

 

세 시간에 걸쳐 30명 남짓한 학생들의 발표가 끝났다. 저마다 ‘기호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시, 소설, 그림, 심지어 음악까지 다양한 창작물을 선보였다. 흥미로운 대목은 대부분 학생들이 인공지능을 처음 써보거나 몇 번 써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챗GPT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따로 배우지 않아도 간단한 검색과 회원가입만으로도 누구나 손쉽게 ​인공지능 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었던 것. 만약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를 한 번도 써보지 않은 학생들에게 고작 일주일 만에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림을 그려서 제출하라고 했으면 그 수준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건 도구의 숙달이 아니다. 오히려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폭넓은 배경지식과 창의적인 질문이 결과물의 차이를 낳았다.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가 정해진 미래라면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이를 결코 간과해선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주입식 교육에 길든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가장 부족한 점이기도 하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교육은 지식을 단순 암기하기보다 스스로 사고하고 응용하는 능력을 기르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인공지능 시대, 교육은 다시 한번 변화를 모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봉성창 기자

 

흥미로운 대목은 또 있다. 만약 이날 과제가 인공지능을 빼고 “기호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시, 소설, 그림과 같은 창작물을 제출하라”였다면 학생들의 반응은 과연 어땠을까. 미대생이 아닌 다음에야 다른 수업도 들어야 하는 바쁜 대학생들이 그림까지 그릴 수 있었을까. 결국 대부분 학생은 죄다 짧은 시만 제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인공지능을 통한 학습은 짧은 시간 매우 효율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창의적인 자율성을 부여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날 강의를 한 최장순 고려대학교 겸임교수는 “‘기호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대가들이나 답할 수 있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개념에 얽힌 학문사적 지식과 이를 현실에 대입해 해석할 수 있는 명료한 세계관이 있을 때 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며 “만약 챗GPT에 의존하지 않았다면 학부생의 수준에선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GPT를 활용해 획득한 정보를 어떤 식으로 취합, 정리했는지 그 역량을 보고 싶었다. 앞으로는 ‘질문하는 힘’, ‘주체적으로 명령하는 힘’이 중요한 시대가 될 것이다. 철학적으로는 소크라테스와 니체의 시대가 새롭게 펼쳐질 거란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봉성창 기자 bong@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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