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진의 계정공유] 뱃살마저 연기하는 최민식을 보는 즐거움 '카지노'

[비즈한국] 사실 ‘카지노’를 초반부에 포기했었다. 필리핀에서 차무식(최민식)이 체포되는 장면 이후 과거로 돌아가 “지금부터 내가 살아온 이야기 좀 해볼까?” 하며 펼치는 차무식의 일대기에 살짝 질렸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콘텐츠가 득시글한 OTT 세상에서 이게 웬 뻔한 아재 누아르인가 싶었다. 성급한 판단이었다. 초반 조금만 견디면 달콤한 시간을 보상받을 거라 강력히 추천한 이가 아니었다면 애먼 곳에서 재미난 작품 찾아 시간낭비 할 뻔했다. 아직 ‘카지노’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명심하자. 초반만 견디면 된다.

‘카지노’는 우여곡절 끝에 카지노의 왕이 된 남자, 차무식의 이야기다. 시즌1은 1970년대와 2000년대, 1980년대와 2010년대 등 여러 시간대를 자유로이 오가며 한국 근현대사와 2000년대 필리핀 한인사회에서의 차무식의 행적을 쫓는다.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건달 아버지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으나 타고난 영특함으로 서울 명문대까지 갈 뻔한 차무식, 의도치 않게 시위에 휘말려 민주화투사가 될 뻔하다 북파공작부대에 입대하는 차무식, 대전에서 큰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이다가 카지노 바 사장으로 거액을 모으며 국세청의 추적을 당하는 차무식, 도박 빚쟁이에서 살인 용의자가 되는 차무식 등 한 인간의 삶에 이토록 많은 굴곡이 있을까 싶을 만치 다채롭다. 

이 서사의 빌드업이 자칫 지루하게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또 보다 보면 친숙함이 느껴진다. 경계선 지능의 남자가 미국의 역사적 사건들을 헤쳐 나가는 ‘포레스트 검프’의 악인 버전 같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격변의 시대를 거쳐온 덕수를 내세운 ‘국제시장’도 떠오르거든. 다만 포레스트 검프가 엄마의 가르침대로 올곧게 인생을 달리고, 덕수가 가족의 건사라는 일생일대의 목표를 향해 분주하다면, 차무식의 목표는 오직 돈이라는 욕망이라는 점이 다르다.

온몸을 물어 뜯겨가며 불개미를 잡아 한약방에 팔고, 다른 소년들이 간신히 몇 부 파는 신문을 무려 100부를 팔아가며 자신의 이익까지 알뜰하게 챙겼던 차무식의 성장과정을 보면 익히 알 수 있는 점이긴 하다. 그 욕망을 향한 집념이 얼마나 컸던지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영위할 수 있던 영어학원 원장을 마다하고 범죄와 맞닿아 있는 카지노의 세계로 들어섰으니까. 

재미난 건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묘하게 차무식에게 동조되고, 응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가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는 거다. 차무식은 빈말로도 좋은 사람일 수 없다. 남에게 덫을 놓고 협박하는 건 기본이고,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서는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고 사람을 보내 버리는 등 스스럼없이 불법을 자행한다. 그러나 또 차무식은 (자신과 자신의 뒷배경이 지닌 능력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초월적인 힘이 있는 데다 배려와 신의가 있는 인물이다.

적어도 ‘자신의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자신의 이익을 제하고라도 챙겨주고, 자금난으로 괴로운 이에게 거금을 턱 내주고, 인터폴에 쫓기는 수배자에게 도망갈 길을 열어주곤 한다. 도저히 내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런데 당신의 주변에 차무식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이렇게 말해줄 거다. “형한테 말해봐. 형이 다 해결해 줄게.” 

어떻게 보면 ‘카지노’의 차무식은 ‘대부’ 시리즈의 돈 콜레오네 같다. 위기상황에서 재빨리 무릎을 굽히며 흥정할 줄 알고, 변죽 좋게 넉살을 떠는 등 돈 콜레오네보다는 위엄이 좀 떨어지는 것 같지만, 원하는 것을 갖는 데는 무자비하되 내 사람들에겐 따스하고 절대적인 울타리가 된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 그러니 우리가 차무식에게 반하지 않을 재간이 있겠나. 내 가족과 내 사람들을 지킨다는 명목이라면 사적 복수에도 열렬히 열광하는 뜨거운 민족이 우리나라 사람들 아니던가. 그러니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차무식이 ‘우리 무식이 형님’이 되면서, 차무식과 대척 지점에 놓여 있는 캐릭터들에 경계의 눈길을 보내게 되는 거다. 그가 설령 ‘추앙남’ 손석구가 연기하는 오승훈 경감일지라도. 

물론 캐릭터의 매력도 있지만, 이 캐릭터에 흠뻑 빠지게 만드는 건 단연 차민식을 연기한 최민식의 공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연기력을 지닌 대배우 최민식은 언제나 뜨겁고 묵직한 에너지로 보는 이를 홀려왔는데, ‘카지노’에서는 그의 치열한 뜨거움이 차갑게 벼려진 느낌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붉은 불꽃이 푸른 불꽃이 된 느낌이랄까. 언뜻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의 유들유들한 비리 세관 공무원 최익현 같지만 훨씬 담백하면서도 정교하다. 그 인물 자체가 되어 버리는 메소드 연기의 대가인 그는 ‘카지노’에서 혀를 차는 숨소리 하나, 튕겨 나올 듯한 뱃살마저 연기를 하는 듯한 모습을 선보인다. 이런 연기를 안방에 앉아 볼 수 있다는데, 디즈니플러스 구독료가 아까울 리 있나. 

차무식의 존재감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카지노’에는 다양한 배우들의 향연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차무식과 대립 관계에 있는 ‘코리안 데스크’ 오승훈 경감 역의 손석구, 차무식의 왼팔과 오른팔 역할을 하는 이상구 역의 홍기준과 양정팔 역의 이동휘에 차무식을 필리핀 카지노계에 끌어 들이는 민석준 회장의 김홍파 등 볼튼 카지노 사람들, 한인회장 역의 오달수와 삼겹살집 사장 역의 김주령 등 한인사회 사람들, 필리핀 실세인 빅보스 다니엘과 삼합회 등 외국인 배우들까지 줄줄이 등장한다. 시즌2 6화에 짧고 굵게 등장한 양상수(이재용)처럼 다소 허망한 서사를 보여주는 이들도 있지만, 차무식에게 설계 대상으로 지목되는 ‘호구’ 정석우 대표처럼 나름의 임팩트를 보여주는 인물도 많다. 

‘카지노’에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는 이유는 자명하다. 욕망을 쫓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면면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 차무식이 있는 카지노는 그 욕망의 정점이다. 욕망을 쫓아 필리핀까지 와 거물이 되었으나 정적, 배신자, 법의 단죄 등이 호시탐탐 차무식의 욕망을 저지하려 한다. 과연 차무식은 그 모든 방해를 뒤로하고 견고한 자신의 왕국을 지킬 수 있을까? 우리는 차무식의 성공에 기꺼운 박수를 보내게 될까 혹은 차무식의 실패에 동정을 보내게 될까. ‘카지노’ 시즌2는 이제 단 2회분이 남았다. 아직 ‘카지노’를 보지 않았다면, 지금이 가장 늘어지지 않고 쫄깃하게 볼 수 있는 타이밍이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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