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는데, 지난번에는 4시간 대기한 적도 있어요. 오늘로 네 번째 방문이지만 새로운 상품이 들어오니 계속 방문하게 되네요.”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더현대 서울 지하 1층에는 진한 파란색 옷과 아이템을 갖춰 입은 사람들로 붐볐다. 가수 영탁의 팝업스토어 ‘탁스 스튜디오(TAKs STUDIO)’에 방문하기 위해 모인 팬들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팬들은 이른 시간 집을 나서 아래층에 별도로 마련된 웨이팅 키오스크에 입장 등록을 하고, 본인의 차례가 될 때까지 대기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했다.
팝업스토어는 영탁이 직접 만들고 조립한 피규어, 직접 그린 그림이나 음악 작업실을 본 딴 장비들로 꾸며졌다. 하지만 전시 공간으로 넘어가기 전 모두가 관문처럼 거쳐가는 곳이 있다. 바로 굿즈샵이다. 대기 중인 방문객들은 매장 입구 주변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어떤 상품을 살지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팝업 종료 하루 전인 이날 방문한 50대 여성 A 씨는 “다들 몇 십만 원씩 쓴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왔다. 일단 후드티는 구매할 것”이라고 말했다. 네 번째 방문한다는 60대 B 씨는 상품 구매 계획을 묻는 질문에 “팬심으로 온 것이라 새로운 굿즈는 다 살 것”이라고 웃으며 답했다.
#팝업스토어는 ‘덕질’ 친구 만남의 장…“굿즈, 실용성 보단 팬심”
이 팝업스토어는 함께 ‘덕질(좋아하는 대상에 빠져 정보나 물건을 모으는 일)’하는 이들의 만남의 장이기도 했다. 30대 C 씨는 동네 친구이자 ‘덕메(덕질 메이트)’와 함께 팝업을 찾았다. C 씨는 “다섯 번째 왔는데 이번엔 지인한테 부탁을 받고 대신 구매할 상품이 있어서 방문했다. 지방에서 못 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런 경우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C 씨와 친구는 영탁이 이어준 인연이다. 콘서트에서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평택에 거주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또 다른 일행과도 첫 만남부터 마음이 통했다. C 씨는 “공통 관심사가 있으니 나이를 불문하고 친해진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이라 이렇게 행사가 있을 때 함께 다닌다”라고 말했다.
굿즈샵에서는 티셔츠나 모자 같은 의류 아이템이나 가정용 소품, 스마트폰 케이스 등의 다양한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실용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영탁 MD, 영탁이 제작에 참여한 아이템이라 구매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를 입증하듯 돌아가는 방문객들의 손에는 영탁의 상징색인 코발트블루 컬러가 접목된 상품들이 묵직하게 들려 있었다.
3월 9일까지 2주간 운영된 탁스 스튜디오는 말 그대로 성황리에 종료됐다. 오픈 첫날을 하루 앞둔 2월 23일 낮부터 주로 5060세대로 구성된 긴 대기 줄이 생겼고, 오픈 첫 주말에만 목표 대비 2배 이상인 3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현장 직원은 “오늘도 백화점 오픈 전 웨이팅이 80명 정도 됐다. 낮에 방문해도 최소 30분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한정판 빵 때문에 줄 선 게임팬들…팬덤형 팝업스토어, 도심 핫플 속으로
팬덤을 집결시킨 문화콘텐츠 팝업스토어는 이곳뿐만이 아니다. 블랙핑크, NCT, 에스파, 뉴진스 등 대세 아이돌이라면 성수동, 더현대 등의 핫플레이스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극대화한 팝업스토어를 오픈한 경험을 한 번씩은 가지고 있다.
유명 아이돌들의 팝업스토어를 직접 관리하는 한 음반사 관계자는 “상품 경험이나 ‘인증샷’이 중요한 일반적인 리테일 팝업스토어와는 조금 다르다. 방문객 모두 누구보다도 해당 아티스트를 잘 알고 니즈도 명확하다. 팝업을 한다고 하니 ‘내 가수 매출을 올려준다’거나 굿즈 수집을 위해 방문하는 팬들이 대다수다. 팬 연령층이 높을수록 구매력도 커진다”며 “매일 품절 되는 상품들이 나오는데 입고가 바로 되는 경우도 있고, 품절 상품은 예약 판매로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K팝 외에 애니메이션, 게임 등 팬덤 문화가 구축된 분야에서 팝업스토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확대되는 추세다. 지난 1월 넥슨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베이커리 태극당 장충동 본점에서 자사 대표 IP ‘바람의나라’ 팝업스토어를 운영했다. 최근 카카오게임즈와 서울 용산구의 한 베이커리가 협업해 문을 연 ‘이터널 리턴’ 팝업스토어는 한정판 빵을 구매하기 위한 행렬로 연일 장사진을 이뤘다.
#슬램덩크 유니폼 사러 밤샘 웨이팅에 ‘n차 방문’까지
그중에서도 더현대는 팝업 문화의 거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하 2층만 해도, 지하철 5·9호선 여의도역 연결통로 바로 앞에 있는 공간부터 양 끝에 총 3개의 팝업 전용 구역을 운영하고 있고 행사 매장 등에서도 팝업을 진행한다. 서울과 대구 양 지점에서 극장판 슬램덩크 흥행과 맞물린 팝업스토어 개점으로 전날부터 대기하는 ‘오픈런’ 현상이 벌어졌고, 유튜브 콘텐츠로 시작한 개그맨 김경욱 씨의 ‘부캐(부캐릭터)’ 다나카의 팝업스토어도 방문객을 맞이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문화콘텐츠 역시 다른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신규 콘텐츠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 보고 있다”며 “제안 받거나 직접 발굴하는 콘텐츠 중에 시기와 고객 타깃이 가장 적합한 상품들을 고르고 있다”고 밝혔다.
엔터사부터 게임사 등 콘텐츠 업계가 팝업스토어의 규모와 접근성을 키우고 본격적으로 활용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수익 창출의 효과를 무시하기 어렵다. 슬램덩크는 더현대 서울에서 처음 5일간 하루에 1억 원 꼴로 매출을 냈고 대구점에서는 오픈 10일 만에 7000명의 방문객과 5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팝업스토어에서는 일반 굿즈 외에도 단독 공식 상품이 판매되는데, 슬램덩크의 경우에도 직수입 물량과 라이센스 상품, 콜라보 굿즈 등이 판매됐고 한정판 피규어와 유니폼 패키지가 웃돈을 얹어 거래될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여기에 콘텐츠사들은 보통 2주간 운영하는 팝업에서 주차별로 상품·이벤트 라인업에 변화를 줘 ‘n차’ 방문과 추가 소비를 유도한다.
하지만 매출 외에도 중요한 특성이 있다. 전문가들은 젊은 세대의 핫플에 좀 더 깊이 침투하고 있는 문화콘텐츠 팝업스토어를 두고 적극적으로 모객을 펼치는 백화점과 팬덤 충성도를 강화하려는 콘텐츠사의 전략이 맞아 떨어진 결과라고 해석했다. 이수진 서울대 소비자학 박사는 “팝업스토어의 가장 큰 목표는 단연 바이럴이다. 백화점에는 팝업의 실적보다도 다른 매장의 매출로 이어지는 집객 효과를 얼마나 이끌어내느냐가 중요하다. 원소주 팝업의 성공으로 ‘팝업은 유통’이라는 기존 인식이 깨졌고 또 팝업의 대상과 주제를 다양화할 필요성도 있었을 것”이라며 “슬램덩크 등 인기를 끈 콘텐츠의 팝업은 팬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상당한 집객력을 가지고 있다, 백화점과 콘텐츠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아티스트를 실제로 보거나 직접 게임을 하는 공간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대상을 공유하고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기능도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팬덤이 모이는 장소는 콘서트 같이 보통 정해져 있는데 백화점 같은 공간에서 운영하면 팬들에게도 색다른 이벤트가 된다”며 “굿즈를 사는 행위에는 구매욕도 담겨 있지만 결국은 팬덤 문화라는 바탕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다만 문화콘텐츠 팝업스토어가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유의미한 모객 효과를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이수진 박사는 “콘텐츠 팬덤형으로 간다면 사실 방문객 연령이 훨씬 더 어려진다. 백화점 주 소비층보다는 수입이 상대적으로 낮은 소비자들의 접근성이 커지기 때문에 단기적인 파급력은 커도 실제 모객 효과는 떨어질 수 있다”며 “앞으로도 팝업스토어는 확대되겠지만 반복적인 형식 등에 피로감을 느끼는 회의적인 반응도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강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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