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유럽 테크업계의 다양성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2022년 여성 창업자가 있는 팀에 투자된 VC 자금은 전체 규모의 1%에 불과했다. 런던에서 인종 다양성을 가진 창업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익스텐드 벤처스(Extend Ventures)는 2020년에 ‘성별을 넘어선 다양성(Diversity Beyond Gender)’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9년까지 10년 동안 흑인 창업자들이 받은 펀딩 규모는 영국 전체 VC 펀딩의 0.25% 규모에 불과했다. 2019년은 영국 VC 펀딩 규모에서 기록적인 해였다. 영국 내 스타트업에만 132억 달러(16조 7000억 원) 이상이 투자됐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 미시간대 경제학과 교수 스콧 E. 페이지(Scott E. Page)는 다양성을 가진 팀이 똑똑한 개인뿐만 아니라, 다양성이 없고 유사성만 있는 재능 있는 개인으로 구성된 팀을 능가한다는 가정을 입증했다. 이를 통해 ‘다양성이 능력을 이긴다(Diversity trumps ability)’는 명제를 이끌어냈다. 그 밖에 다양성을 가진 그룹의 성과가 높다는 것을 증명하는 예는 많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2018년 실시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경영진의 다양성이 높은 기업의 매출이 일반 기업보다 19%가 높았다.
따라서 ‘다양성’은 성공을 꿈꾸는 스타트업이라면 누구나 주목해야 할 가치다. 이번 칼럼에서는 다양성에 중점을 둔 유럽 스타트업 생태계의 주요 플레이어를 소개한다.
#다양성에 투자하는 유럽의 VC
가장 먼저 소개할 곳은 ‘임팩트 엑스(Impact X)’다. 2018년 런던에서 설립되었으며, 주로 아프리카예 카리브해(Afro-Caribbean) 출신의 디아스포라(이민자) 기업가를 지원한다. 특히 시드, 시리즈 A, 시리즈 B 단계의 투자를 진행하며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기술과 창조 산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주로 흑인 창업가, 기관 투자가, 투자 은행가, 대학교수가 주도해 만들어졌다.
임팩트 엑스는 흑인을 위한 코스메틱 브랜드 아프로센칙스(afrocenchix), 이민자에게 불공정한 보험료를 지불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나선 인슈어테크 회사 마시멜로(marshmallow) 등에 투자했다. 인종 또는 이민자와 같은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운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기술 스타트업에도 투자한다. 의료 임상 시험 과정을 디지털 프레임 워크로 서비스하는 알그리드(rgrid), 텔레비전과 영화 전문 프로덕션 스리 테이블스 프로덕션(Three Tables Productions)이 그 예다.
테크업계에서 과소 대표되는 성소수자(LGBTQ+)를 지원하는 VC도 있다. 런던의 ‘프라우드 벤처스(Proud Ventures)’는 LGBTQ+ 투자자 그룹이다. 프라우드 벤처스가 2023년 2월에 발간한 영국 LGBTQ+ 창업자 보고서(The 2023 UK LGBTQ+ Founder Report)에 따르면, LGBTQ+ 창업자의 20%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는 것이 투자 유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창업자의 3분의 1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절대 알리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LGBTQ+ 창업자 한 명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투자자가 “문화적으로 적합하지 않다”며 투자를 철회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성적 지향 때문에 차별을 받는 성소수자 창업자를 지원하기 위해 프라우드 벤처스가 만들어졌다.
프라우드 벤처스는 더 작고 친밀한 커뮤니티를 지향한다. 서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의도적인 노출을 지양하고, 안전한 커뮤니티로서 자금 지원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 프라우드 벤처스는 영국 4대 VC 중 하나인 발더톤 캐피털(Balderton Capital),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영국, 프랑스, 한국, 독일 등 전 세계 18개국에 사무실을 둔 글로벌 VC 앤틀러(Antler), 영국의 옥토퍼스 벤처스(Octopus ventures), 펜트랜드(Pentland Ventures) 등 다양한 VC가 멤버사로 함께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최근에 설립된 ‘크로톤캐피털(Croton Capital)’은 과소 대표되는 여성을 지원하기 위한 투자자들의 연합체다. 베를린과 마드리드를 오가며 활동하는 투자자 안나 퍼듀로(Anna Fedulow)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C 레벨급(최고위 임원) 이상의 여성 20명으로 구성된 국제 비즈니스 엔젤 투자자들의 연합체라는 것이 특징이다.
크로톤캐피털은 초기 단계의 투자를 원하는 여성 창업가에게 직접 자금을 투자할 뿐만 아니라, 스타트업과 기업의 경영진으로서 가진 전문성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창업자에게 멘토링도 제공한다.
#테크업계의 다양성 성장을 돕는 커뮤니티
테크업계의 다양성은 다양한 형태로 확장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서로와 서로를 지지하는 커뮤니티 형태가 일반적이다. 최근 베를린 테크업계에서 가장 핫한 커뮤니티는 ‘투하츠(2hearts)’다. 투하츠는 ‘두 개의 심장’이라는 뜻으로 베를린 테크업계에서 두 개 이상의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연결하는 커뮤니티다. 이민자 배경을 가진 투자자, 창업자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윅스(Wix)의 독일어권 지역(DACH) 총괄본부장 출신 이스켄다르 디릭(İskender Dirik), 다국적 미디어 회사 베텔스만의 M&A 부문 부사장 출신 옥타이 에리치야즈(Oktay Erciyaz), 독일 최대 출판기업 악셀 슈프링어(Axel Springer) 운영팀장 출신 귈자 빌케(Gülsah Wilke), 알리안츠와 삼성 카탈리스트 펀드의 투자부문장 출신 민성 션 킴(Min-Sung Sean Kim)이 투하츠의 창립 멤버다. 앞의 세 사람은 터키 출신, 민성 션 킴은 한국 출신이다. 모두 베를린 테크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이민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2개의 문화권을 모두 포용하고 이끄는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전제가 투하츠 커뮤니티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따라서 이 커뮤니티는 다양성을 가진 젊은이들의 멘토이자 길잡이가 되고, 비즈니스에서 개인 생활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연결하고 도와준다.
투하츠는 슬랙 커뮤니티 운영을 통해 1대1로 연결되도록 돕는다. 질문하고 토론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장이 되도록 한다. 또 100명 이상의 멘토가 이민자 배경을 가진 학생과 청년을 지원하는 다양한 멘토십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그 밖에 커뮤니티 자체를 홍보하면서, 이민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링크드인 등 비즈니스 SNS를 통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밖에 다양한 이해관계자, 정치인, 기업과 협력해 유럽 테크업계에서 이민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일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LGBTQ+ 리더들의 글로벌 커뮤니티 ‘람(RAHM)’도 빼놓을 수 없다. 람 커뮤니티는 베를린의 울랄라(UHLALA)그룹이 만든 커뮤니티다. 울랄라그룹은 독일에서 성소수자를 지원하는 소셜비즈니스 기업이다. 2009년 설립돼 LGBTQ+의 커리어를 지원하고 연결하는 프로젝트 등을 하고 있다.
람 커뮤니티는 2017년 만들어졌고, 성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혁신가, 기업가 등을 연결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한다. 베를린에 거점이 있지만 전 세계 사람을 연결한다. 700명 이상의 회원이 활동하며, 매년 람 콘테스트(RAHM Contest)를 주요 행사로 연다.
람 콘테스트는 리더십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일종의 이벤트다. 1년에 한 차례, 2일 동안 열리는데 참가자의 다양한 스피치와 토론을 통해 최고의 리더십을 가진 사람을 선발한다. 새로운 리더십에 관한 다양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남성적 리더십의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혁신적인 솔루션을 제공한다.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한국에서 살다가 베를린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것은 참 독특한 경험이다. 나는 이방인이지만, 베를리너로 포용될 때가 많다. 실제 베를린의 인구 구성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베를린 인구의 약 20%는 외국 태생이다. 베를린에서 태어났지만, 적어도 부모 한 명이 외국인인 사람까지 포함한다면, 이민자 배경을 가진 사람의 비율은 굉장히 높을 것이다. 여기서는 나도 거의 다수에 속하는 셈이다.
베를린 관청에서 문서를 작성하다보면, 성별란에 여성, 남성 이외에도 ‘다성(divers)’, ‘정할 수 없음(keine Angabe)’ 등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타고난 나’를 감출 필요 없는 이곳에서는 어떤 사람에게든 더 많은 기회가 있어 보인다. 혁신을 추구하는 스타트업에게도 다양성은 지금까지 숨어 있던 시장의 문을 열 수 있는 키가 될 것이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유럽스타트업열전] '음악에서 의료로' 스포티파이 창업자의 새로운 도전
·
[유럽스타트업열전] '더 글로리' 열풍 속 학폭, 왕따 해결하는 유럽 스타트업
·
[유럽스타트업열전] '카피 논란'에 멍드는 혁신 생태계
·
[유럽스타트업열전] 베를린 스타트업 탄생지서 열린 2023년 첫 '밋업'에 가다
·
[유럽스타트업열전] '기술강국' 독일 이끄는 4대 연구소의 스타트업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