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아이돌 고시’에 견주는 K팝 연습생 트레이닝 체계는 숱한 스타의 탄생을 이끌었다. 글로벌 시장을 주무르는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 역시 시작은 연습생이었다. 이제 K팝 아이돌은 대중음악을 구성하는 하나의 장르가 됐고 한국의 제작 시스템을 도입하는 해외 사례도 생겨나고 있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창업자가 고안한 이 방식이 업계의 기준이 된 이유는 분명하다. ‘보는 음악’이라는 K팝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매력과 춤, 노래 실력을 함께 ‘훈련’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매니지먼트 사업을 영위하는 기획사와 에이전시 열 곳 중 한 곳이 평균 6명의 소속연습생을 두고 있다(2021년 기준). 가수를 지망하는 소속연습생 수만 해도 약 1400명에 달한다. 계약서를 쓰지 않은 채 연습하는 ‘견습생’과 회사 문턱도 넘지 못한 국내외 지망생까지 더하면 그 수를 100만 명 수준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K팝의 저변이 넓어지고 새롭게 데뷔하는 다국적 아이돌 그룹이 늘어난 만큼 연습생의 국적도 다양해지고 있다.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외에도 남미, 유럽 등 K팝 수요가 생긴 나라의 젊은이들이 꿈을 찾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칠레에서 온 한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다국적 지망생들의 K팝 도전기를 따라가봤다.
#게스트하우스서 3년간 생활, 계약 문제로 고비도
칠레 청년 제레미의 일과는 오전 5시 50분에 시작된다. 기상 후 명상을 하고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7시 30분부터 보컬 연습에 돌입한다. 짧은 ‘노동’ 시간도 있다.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오전 11시부터 청소 업무를 돕는다. 한국 생활 5년 차 제레미는 3년 넘게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동안 숙소는 운영주가 바뀌고 리모델링 후 새 간판을 달았다. 햇볕이 잘 드는 방 한 칸을 한국 생활의 터전으로 삼는 대신 매일 정오 무렵 숙소 직원으로 변신해 청소 일을 거든다.
업무가 끝나면 다시 채비를 하고 오후 2시까지 이대 인근 연습실로 향한다. 저녁 시간 숙소로 돌아오고 나서도 혼자만의 춤과 노래 연습은 계속된다. 게스트하우스 5층의 넓은 공간은 연습실 버금가는 제레미만의 트레이닝 공간이다. 말 그대로 하루 일과가 오직 숙소와 연습실을 오가는 루틴으로 짜여 있다.
다른 일정이 끼어드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모델 아르바이트가 잡히면 기존 일정을 미뤄두고 나선다. 그 덕분에 크고 작은 필모그래피가 쌓이고 있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외국인 예술인비자는 아티스트나 모델 관련 일만 가능해 일반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다. 숙소 거주를 위한 청소와 모델 알바는 그가 연습생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현실적인 생계 활동이다.
2019년 칠레를 떠나 한국에 온 제레미는 2000년생(만 22세) 해외 국적 연습생이다. 예술학교 학생이던 시절 보이그룹 엑소(EXO)의 노래와 무대에 빠져든 것을 계기로 학업을 마친 후 본격적인 연습생 생활을 위해 짐을 쌌다. 한국 땅을 밟은 건 4년 정도 됐지만 K팝 지망생으로서의 사전 준비는 훨씬 오래전인 2014년 시작됐다. 예술학교에서 노래하고 기타와 피아노를 다루다가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한국어 공부도 병행했다. 한국어 공부를 위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한국 연습생 생활 중 부침도 겪었다. 혼자 비자 문제를 해결하며 일본과 베트남에서 몇 개월을 지내야 했다. 한국에 발을 디딘 2019년부터 계약 문제로 약 3년을 허비했다. 그동안 제레미는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이고 발품을 팔아가며 개인 트레이닝을 받았다. 제레미는 “배우기 위해 한국에 왔다. 혼자 어떻게든 연습실을 찾아 연습했다”고 밝혔다.
제레미는 그나마 비슷한 문제를 겪은 다른 해외 연습생들보다 사정이 나은 편이다. 현재는 업계 관계자들의 도움으로 새롭게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예전 보컬 강사가 다리를 놔준 덕에 올해 1월 에이전시에 들어갔다. 게스트하우스 관계자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노력하는 모습에 주변에서 모두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온 많은 연습생들은 고시원이나 게스트하우스를 전전하며 생활한다. 10대부터 20대 초반의 외국인 연습생들은 거주 환경부터 계약 등 의사결정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어른들의 보호로부터 벗어나 있다. 녹록지 않은 한국 생활에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모델 등으로 전향해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제레미는 올해부터는 서바이벌 오디션 방송 등 각종 활동에 적극 나설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나이가 더 어리고 실력이 월등해야 한다는 기준에 못 미치거나 칠레라는 생소한 국적 탓에 오디션에서 떨어진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제레미는 “경쟁도 두렵지 않고 충분히 연습해 성장하고 싶다”며 강한 의지를 내보인다.
#K팝 본류 ‘바늘 구멍’ 뚫으려 남미·유럽에서도 도전
경유편으로 24시간. 칠레와 한국 사이에는 비행기 직항편이 없다. 제레미와 더불어 먼 타국에서 떠나온 많은 지망생들의 강한 의지는 K팝 본류에 대한 열망과 맞닿아 있다. K팝 아이돌 시스템은 노래, 안무, 의상과 콘셉트, 멤버의 캐릭터와 포지션까지 전문가와 회사가 함께 기획한 결과물이다. 데뷔부터 성공까지 길이 매우 좁아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한다’는 말로 수식되지만 그만큼 완벽한 모습으로 전 세계 팬들을 사로잡는다. 또 K팝에 대한 수요가 양적으로 늘어나는 동시에 비아시아권, 비영미권 등 수용 지역이 다양해지면서 K팝 아이돌 지망생의 국적도 다양화됐다.
관세청 수출입 무역통계를 보면 2022년(1~11월) 우리나라 음반 수출액은 2억 1569만 달러(2700억 원)로 2021년 처음 2억 달러를 넘긴 후 올해도 최고 기록을 갈아치울 것으로 전망된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수출 국가가 2016년 60개국에서 2021년 148개국으로 늘며 영토 확장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별로는 일본, 중국, 미국 순으로, 이 밖에도 대만, 태국, 네덜란드, 프랑스, 홍콩, 독일 등 다양한 국가가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현장에서는 이미 다국적 지망생의 유입을 체감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018년부터 2년,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2년 두 차례 연습생 생활을 경험한 20대 초반 A 씨는 “주요 오디션에 해외에서 온 지망생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점점 늘었다. 일본, 동남아 출신 친구와 함께 연습생 생활을 한 적도 있고, 일반 레슨을 받을 때도 외국인 친구들이 종종 보였다. 해외 현지 오디션도 있으니 내가 보고 들은 것보다도 더 많은 해외 출신 지망생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다양한 국가의 음악 시장에 K팝이 안착했다는 방증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윤하 음악평론가는 “K팝이 얼마나 깊게 침투했는지보다는 그 문화가 청년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는지가 중요하다. 그 매력이 해외의 10대, 20대가 쉽지 않은 도전에 뛰어들게 만드는 원동력”이라며 “특히 블랙핑크의 리사나 갓세븐의 뱀뱀처럼 한국 아이돌로 성과를 거두게 되면 그 나라에서는 10대들의 우상 같은 존재가 된다”고 짚었다. 실제로 최근 하이브 걸그룹 뉴진스의 베트남계 호주인 하니가 인기를 얻고 있는데, 베트남은 최근 몇 년간 K팝이 급성장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업계는 연습생 발굴과 아이돌 제작은 결국에는 원석을 어떻게 갈고 닦느냐의 문제라고 말한다. 주요 기획사의 한 관계자는 “유튜브 조회수만 봐도 러시아, 동유럽, 남미 쪽에서 시청자가 상당히 많다. K팝의 중심에서 성장하고 싶다는 꿈을 키우는 끼 있는 친구들이 나오는 것”이라며 “표준계약서 작성, 활동 시간 제한 등 육성, 관리 시스템 자체도 많이 개선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기획사 관계자는 “다양한 국가에서 새로운 잠재력을 가진 인재들이 몰린다면 결과적으로는 K팝의 지속성을 강화하고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는 선순환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강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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