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직장 내 여성차별을 평가한 ‘유리천장 지수’에서 한국은 10년 연속 꼴찌를 하며 ‘여성이 일하기 가장 힘든 나라’라는 불명예를 달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 국내 1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수가 처음으로 400명을 넘어섰고, 주요 대기업의 연말 인사에서도 여성 CEO 발탁이 눈에 띄게 늘었다. 견고했던 유리천장에 금이 가고 있다는 희망적 목소리도 들려온다. 비즈한국은 각 분야에서 활약 중인 여성 리더를 만나 유리천장을 깰 수 있던 비결을 물었다. 보이지 않는 벽 앞에서 용기를 내려는 많은 여성에게 이들의 이야기가 좋은 자양분이 되길 바란다.
최근 통계청이 결혼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미혼 남녀 중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중은 50%로 2년 전보다 1.2%p 낮아졌다. 결혼은 ‘선택’이 된 지 오래이며, 비혼을 결정하는 사람은 날로 늘고 있다. 결혼 장려 활동에 앞장서는 박수경 듀오정보 대표(59)는 이런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그는 “요즘은 남성도 결혼, 육아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버겁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등가교환의 법칙이라고 하지 않나. 세상에 공짜 희생은 없다. 지나고 보면 그만큼의 대가가 돌아온다”며 “결혼과 육아를 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도 많다. 여러 역할을 하며 멀티태스킹 능력이 생기고 세상을 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배려심이나 다양한 사고 능력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시간강사 생활만 10년, 30대 중반 아모레퍼시픽 입사해 6년 만에 최연소 임원
‘결혼과 육아의 부담’이 적지 않다는 것은 박 대표 역시 공감하는 부분이다. 그 또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고군분투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그때의 얘기를 하면 대하소설, 대하 드라마가 따로 없다”며 웃었다.
스물일곱 살에 결혼해 2년 후인 스물아홉 살 출산을 하던 때 박 대표와 남편 모두 대학원생이었다. 공부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틈틈이 돈까지 버느라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남편과 수업 시간표가 겹치지 않도록 짜며 육아의 공백을 없애야 했고, 시험 기간에 아이를 부산에 있는 친정에 맡기고 돌아오며 기차에서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
힘들게 육아와 학업을 병행했지만 돌아온 결과는 기대치를 밑돌았다. 시간강사 생활만 10년을 했지만 교수 임용은 쉽지 않았다. 우연히 아모레퍼시픽 특채 기회를 얻었는데, 그마저도 ‘기혼’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고객중심경영이 주목 받을 때였는데, 어느 날 서경배 회장이 학교 교수님에게 소비자학 전공자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미혼이면서 석사 과정을 마친 20대 학생을 원한다고 했다. 30대에 결혼해서 아이도 있고 박사 과정을 마친 나와는 조건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교수님이 ‘다른 학생은 없다’며 나를 적극 추천한 덕에 입사할 수 있었다.”
2000년 태평양(현 아모레퍼시픽)의 미용연구팀 과장으로 입사한 박 대표는 학교생활과는 다른 회사 생활에 적응하느라 진땀 깨나 흘렸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문구류는 직접 사야 하는 줄 알고 홀로 커다란 책가방에 필통까지 챙겨 들고 출퇴근을 했다. 판매직에게 소비자 트렌드를 공유하는 자리는 학술발표를 연상케 해 ‘연구는 학교에 가서 하라’는 뒷말을 듣기도 했다.
무엇보다 의지할만한 여성 동료가 없다는 게 아쉬웠다. 박 대표는 “화장품 회사인만큼 또래의 여직원이 많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신임 과장 교육에 가니 180명의 동기 중 여성은 나 혼자였다”며 “그때 내 나이가 30대 중반이었는데 여직원 대부분은 자녀를 돌보기 위해 퇴사했더라. 그러니 다른 직원들 사이에서 ‘그만두고 나갈 나이의 직원을 왜 채용하냐’는 불평이 나왔고 ‘길면 3개월 정도 버틸 것’이라며 수군댔다”고 말했다.
얼마 안 가 박 대표에 대한 반감은 누그러졌다. 과장으로 입사한 지 3년 만에 팀장 자리에 앉으며 ‘실력’으로 존재감을 입증했고, 입사 6년 만에 마케팅부문 소비자미용연구소장 상무로 승진했다. 아모레퍼시픽 최초·최연소 여성 임원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고객 관련 커뮤니케이션부터 광고 커뮤니케이션까지 도맡으며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드는 일에 앞장섰다.
“책임감이 원동력이 됐다. 화장품 회사의 마케팅 부서에 여성 인재가 이렇게 많은데 임원은 한 명도 없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길을 잘 만들어야 나중에 여성 임원이 계속해서 늘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일했다. 일할 때만큼은 ‘여성’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남자 직원들과 똑같이 일하고, 그들의 조언도 흘려듣지 않았다.”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준 가족의 도움도 컸다. 박 대표 대신 남편이 육아에 좀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동생의 지원도 받았다. 박 대표도 엄마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워킹맘은 자녀와 보내는 시간이 적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육아는 양보다 질이다.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마음껏 놀아주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좋다. 워킹맘 후배들에게 늘 하는 얘기가 ‘회사에서 아이 생각하지 말고, 집에서 회사 생각 하지 말라’는 거다. 엄마는 출근해서도 늘 아이를 걱정하는데, 자녀들은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다.”
#사회에서 뒤처질까 비혼 택하는 여성 늘어, 여성이 일하기 좋은 환경 만드는 게 급선무
학교에서 치열하게 공부했던 30대, 국내 1위 화장품 기업에서 최연소 임원이 된 40대를 지나 50대의 커리어를 고민하던 그에게 결혼정보업체 듀오정보의 CEO 제안은 솔깃했다. 대학 시절 전공이던 가정관리학과 잘 맞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기회가 생긴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취임 당시만 해도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전문경영인으로 한 기업을 이끈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회사를 꾸준히 성장시키며 CEO로서의 역량을 입증했다. 지난 몇 년간 팬데믹으로 만남 자체가 어려워진 탓에 결혼정보업체의 타격이 상당했을 때도, 듀오는 고비를 이겨내고 2021년 역대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박 대표는 “코로나19 직전에 구조조정을 했다. 듀오웨드(웨딩컨설팅), 듀오아카데미 등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며 “선택과 집중이 신의 한 수가 됐다. 덕분에 코로나19를 잘 버텨낼 수 있었고,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10년 가까이 결혼 시장에 몸담다 보니 달라지는 트렌드도 가장 빨리 느낀다. 박 대표는 “초혼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회원의 평균 나이도 10년 전보다 2~3세 높아졌다. 결혼은 해도 출산은 하지 않겠다는 여성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여성이 일하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결혼과 출산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한다. 여성이 결혼이나 출산으로 인해 사회에서 뒤처질 수 있다고 생각해 이로 인해 결혼을 꺼리면서 성비 불균형이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출산에만 정책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문제를 먼저 살펴야 한다. 젊고 훌륭한 여성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육아가 여성의 일이 아닌 인간의 일이라는 것에 공감하길 바란다. 세상은 달라졌고, 그런 모습을 인정하고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박해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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