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경력 2년 이상자를 우대요건으로 하여 신입채용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초대졸 이상으로 특정 면허를 소지해야 하는 직무였는데 졸업을 앞둔 20대 초반의 사회초년생부터 경력 8년이 넘는 30대 중반의 베테랑까지 꽤 다양한 스펙트럼의 지원자가 모였다. 아주 이름난 회사는 아니지만 조직규모나 워라밸, 그리고 정규직으로서 안정적인 정년보장이 장점이다보니, 나이와 경력을 불문하고 신입으로 재도전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당시 채용을 요청한 부서에서는 학교를 갓 졸업한 병아리보다는 단 1년이라도 실무경력이 있는 신입을 채용하고 싶어했는데, 최종 합격자는 경력 8년 차의 30대 중반의 남성 A였다.
A가 입사하고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의 소속 부서장 B가 면담을 요청해왔다. A가 부서 내 집단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다며 정신과 치료를 받기 위해 30일간의 병가를 청구했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직장내 괴롭힘법(근로기준법 76조의2)이 시행된 지 얼마 안된 즈음이라 ‘괴롭힘’이나 ‘집단 따돌림’이라는 말에 굉장히 민감할 때였다. B는 A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따돌림과 괴롭힘이 있었는지를 물었는데, A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이 외부 경력 8년 차임에도 불구하고 팀원들이 경력직으로서 대우를 해주기는 커녕 막내들이나 할 법한 각종 잡무를 시키고 있다는 것이 주된 사유였다.
이에 B는 그동안 우리 부서에서는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대내외 협조사무와 부서 내 기본 살림(예산, 애경사, 각종 행사 등)부터 담당하도록 업무를 지정해왔기 때문에 A에게만 해당업무를 시킨 것이 아니라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또한, 그 과정을 거쳐야 이 회사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빨리 파악할 수 있으며 타 부서의 주요 연락처를 알아두면 대외협조 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조언했다.
그러자 A는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중간관리자 C(여성, 30대 초반)를 특정하며, 나이로 보나 면허취득일로 보나 여러모로 자신이 선배인데 마치 하급자 대하듯이 하는 명령조로 업무를 지시하는 것이 불만이라고 불평했다. B는 당신이 외부 경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경력직이 아닌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것이고, 비록 나이는 어리더라도 C는 이 회사에서 경력이 10년이 넘은 선배이므로 위임된 범위내에서 업무를 분장하고 관리할 권한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B가 인사팀을 굳이 찾아온 것은 A가 혹여나 신입이 아닌 경력직으로 입사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급여 산정에 있어 경력을 제대로 인정받은 것인지 근로계약서를 재차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A 본인이 스스로를 너무나 과장급 경력직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외려 자신이 앞서 설명한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A는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으며, 본인이 직접 작성한 지원서 곳곳에서 드러나듯이 지원 당시부터 이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과거 경력들은 회사의 취업규칙에 따라 일부 환산되어 사회초년생들보다는 높은 급여를 받았으니, 경력을 모두 허공에 날린 것도 아니었다. 경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은 ‘중고신입’인데 본인에게 신입이나 하는 허드렛일을 시킨다며 따돌림을 운운하고 있는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부서장 B는 부서 운영상 불가능하다며 30일간의 병가를 반려했고, 그로부터 1주일 후 A는 부서장 B를 비롯하여 중간관리자 C와 소속 부서원 전원을 피진정인으로 하는 직장내 괴롭힘 신고서를 제출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제1호 직장내 괴롭힘 사건이어서 감사실에서 직접 나와 강도 높은 조사를 진행했는데, 조사가 진행되는 50여 일 동안 A는 병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
A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경력자 우대’라고 적혀 있는 채용공고와 자신의 업무일지, 그리고 녹취자료를 제출했다. 해당 녹취자료는 주로 부서장인 B나 C와 주고받은 대화를 녹음한 내용이었으며, 업무일지에는 동료들 중 일부가 근무 시간에 몇 분 동안 부동산이나 증권사이트에 접속했다는 기록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감사결과 B와 C의 지시행위나 언동, 그리고 녹취자료에 존재하는 기타의 사실내용들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서거나 특별히 문제 될 내용이 없었기에 직장내 괴롭힘은 인정되지 않았다. 다만 근무 시간 중 부적절한 사이트에 접속한 이력이 확인된 몇몇 팀원에 대해 근무태만으로 주의경고하는 수준으로 감사는 마무리 되었다. A는 직장내 괴롭힘 불인정이라는 감사결과가 나온 이튿날 인사팀에 찾아와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 사유는 ‘개인 사유’였고, 입사일로부터 만 1년을 꽉 채운 바로 다음 날이었다.
A는 ‘실무경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채용 시 우대하겠다’는 내용을, 설마 진짜로 ‘당신을 경력직처럼 특별히 잘 대우해드리겠다.’ 라고 이해한 것일까? 정말 그의 문해력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냥 학번이나 나이로 줄 세우기 좋아하는 젊은 꼰대 였을까? 연차와 병가 등 각종 휴가제도를 사용해 적당히 쉬엄쉬엄 일하면서 1년을 꽉 채운 뒤 퇴직금을 받고 거쳐 가는 곳 정도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 나이와 연차를 포기하고 중고신입으로 입사는 했지만 자신의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여 뒤늦게 자괴감에 빠진 것일까? 혹시 감사결과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실제로 나이 많은 중고신입 A를 향한 보이지 않는 텃세가 있었던 건 아닐까? 진짜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중고신입 A는 2019년 가장 핫했던 직장내 괴롭힘 신고서를 제출한 1호 직원이 되었다.
직무중심의 블라인드 채용정책으로 신입채용 입사지원서에 나이나 과거 경력을 적는 칸을 삭제하면서 중고신입의 입사지원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직장경력은 있지만, 여러 가지 사유로 신입채용에 다시 지원한 사람들. 직무 경험도 어느 정도 있고, 크든 작든 조직생활을 겪어 봤기에 회사에 대한 환상은 적고 적응은 빠르니 회사입장에서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꼭 중고신입을 선호해서가 아니라, 직무를 중심으로 평가하다 보니 이미 한 번쯤 어딘가에 채용되어 봤고 일도 좀 해 본 사람이 필기든 면접이든 경쟁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다.
실제 블라인드나 리멤버 같은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도 중고신입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경험담이나 조언을 구하는 글이 곧잘 올라오기도 한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본인이 중고 신입으로 지원하겠다고 선택한 이상 새로운 곳에서 다시 한번 처음부터 배우겠다는 생각을 갖고 업무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력직으로서 특정 직무나 직급에 바로 채용된 것이 아닌 이상 과거 직장에서의 경력은 입사 이후 부서 배치나 업무분장에 참고가 될 뿐이다.
경력과 무관한 부서에 배치될 수도 있고, 경력과 유관한 업무를 한다고 할지라도 신입사원에게는 우선 신입사원으로서의 업무와 역할을 배정하기 마련이다. 이전 직장과의 비교, 경력을 포기했다는 억울함, 나이나 연차가 자기보다 어린 선배 밑에서 일해야 하는 불편함,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불만은 금물이다. 그럴 바엔 제대로 경력을 인정받아서 해당 분야의 경력직으로 이직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필자 김진은?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을 합쳐 3000명에 달하는 기업의 인사팀장을 맡고 있다. 6년간 각종 인사 실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비법을 ‘알아두면 쓸데있는 인사 잡학사전’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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