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A 변호사는 최근 검찰에 기소된 기업 사건 변론을 맡아 검찰의 수사기록을 받아보기 위해 열람·등사를 신청했다가 깜짝 놀랐다. 검찰청 내 복사센터에 수사기록 열람·등사를 원하는 변호인들이 워낙 많아 짧아도 두 달, 길어도 세 달은 기다려야 관련 자료를 받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어서다. A 변호사는 “최근 검찰 수사들은 관련 자료들이 적어도 A4 용지 3000~4000장, 많으면 10만 장은 가뿐히 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면서도 “그만큼 재판이 지연되는 것은 결국 피고인의 피해 아니겠냐”고 지적했다.
지난 2021년 4월 삼성그룹 불법합병 및 회계부정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첫 재판에서도 검찰 기록 열람·등사는 논란이 됐다. 이재용 부회장 변호인단은 검찰의 열람·등사가 미진하다며 “신속 재판을 주장하는 검찰 의견과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검찰은 이를 놓고 “사건이 방대하다(보니 자료가 많다)”며 “변호인들이 확인할 수 있게 작업하는 중”이라고 맞섰다.
로펌과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열람·등사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다. 열람·등사가 제때 이뤄지지 않아 재판이 지연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 대표적인 사건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연루된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이다. 열람·등사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으면서 공판준비기일만 6번 진행됐고, 기소된 지 1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공판이 개시됐다.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 사건도 유사하다. 피고인 측 변호인들은 “검찰 수사기록을 전혀 열람·등사하지 못했다”며 검찰의 공소사실에 대한 인정 여부도 답하지 못했다. 재판부가 직접 나서 “수사기록 열람이 최대한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할 정도다.
검찰의 수사기록은 변호인에게 중요한 검토 자료다. 검찰이 어떤 증거를 가지고 의뢰인(피고인)을 기소했는지 파악해야 대응 전략을 짤 수 있다. 자연스레 열람·등사는 피고인 방어권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기록도 보지 않고 방어를 할 수는 없다. 의뢰인(피고인)이 기소가 되면 변호인들이 가장 먼저 검찰의 수사기록 열람·등사를 신청하는 이유다.
검찰은 열람·등사를 모두 허락하지 않는다. 언론이 주목하는 주요 사건의 경우 일부 핵심 자료는 열람·등사를 치열하게 검토해 승인한다. 핵심 증거가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하지만 최근 열람·등사가 지연되는 것은 이보다는 ‘복사기 부족’ 탓이라는 게 변호사들 다수의 지적이다. 갈수록 사건들이 복잡해지면서 증거자료는 많아지는 데 비해, 복사기가 부족하다는 얘기다.
현재 대검찰청은 29개 검찰청 민원실에 고속스캔복사기 60대를 2019년부터 5년간 임대 형태로 배치해 운영 중이다. 하지만 최근 4년 동안 추가로 배치된 복사기는 없다. 그 사이 사건들은 복잡해지면서 증거자료가 방대해졌다. 계좌 추적, 통신기록 조회 등 종이를 많이 사용하는 증거자료들이 수사의 기본자료가 되면서 간단한 수사도 수백 장은 기본으로 열람·등사해야 한다. 돈의 흐름이 무조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기업 사건의 경우 적어도 수만 장, 많으면 수십만 장에 달한다. 앞서 언급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건의 경우 수사기록만 20만 장이 넘었다.
열람·등사를 희망하는 이들의 수요를 맞추기에는 현재 복사기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재판 일정은 검찰 복사기 일정에 달렸다”는 하소연까지 나온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아예 서초동에서 자료만 복사하는 직원들이 있을 정도로 검찰 수사기록을 받아보는 게 쉽지 않다”며 “복사기를 늘리지 않으면 지금 두세 달인 대기 기간이 네다섯 달로 늘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차해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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