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동그라미나 세모, X자나 正자 등을 그렸다 지웠다 반복하는 의미 따윈 찾아볼 수 일, 그것을 하루 종일 하는 직업이 있다면 당신은 받아들일 것인가? 이때 월급 실수령액은 613만 780원으로, 신입사원 기준의 연봉이 1억 가까이 된다. 왓챠 오리지널 6부작 드라마 ‘사막의 왕’의 질문이다.
드라마 ‘D.P.’의 원작 웹툰을 그린 김보통 작가가 각본을 쓰고 일부 연출까지 맡은 ‘사막의 왕’은 ‘돈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과 돈이 다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각 회마다 각각의 이야기를 그리는 옴니버스 구성이지만 각 편의 주인공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이 드라마의 톤은 다소 독특한데,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는데 디테일은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것. 이 간극이 빚어내는 드라마의 톤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독특하고도 독한 설정으로 사회 풍자를 하는 블랙 코미디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가 떠오르기도 하고, 내막에 돈 많은 자본가가 있다는 점에서 ‘오징어 게임’이 연상되기도 한다.
1화에서는 대기업 ‘문팰리스’에 입사한 이서(정이서)를 내세워 ‘사막의 왕’이 어떤 드라마 톤인지 한눈에 보여준다. ‘메타버스유비쿼터스NFT디지털컨버젼스빅러닝TF부’라는 온갖 요즘 유행하는 단어들을 죄다 붙여 놓은 요상한 부서에 입사하게 된 이서는 23층에 위치한 사무실에 가기 위해 매일 비상계단을 올라야 한다. 엘리베이터에는 23층 버튼이 없고, 22층에 내려서 한 층만 계단으로 올라가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드넓은 사무실에서도 자리에 가기 위해선 구불구불 놓인 종이 위로만 발을 디뎌야 한다. 종이길 외의 공간은 ‘사막’이라 불리며 밟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가장 압권은 이서가 매일 업무시간에 해야 하는 일. 디렉터의 지시에 따라 A4 용지에 빽빽하게 동그라미를 그리거나 X자를 그리는 등의 단순 노동이 이 부서의 업무다. 보람은커녕 그 어떤 의미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업무를 두고 동료들은 ‘개발 중인 메타버스 게임 내에서 콘텍스트가 생략된 반복적 퀘스트가 MZ세대 유저에게 끼치는 영향을 측정하는, 런칭 후 발생할 수 있는 이슈들을 사전에 시뮬레이션하기 위한 베타 테스트 같은 거’라고 장황하게 설명한다.
이서의 부서가 하는 일은 묘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언어들은 보통의 회사와 소름 끼치게 흡사하다. 작은 실수를 트집잡아 과하게 화를 내며 이서를 윽박지르는 상사의 언어도, 기가 죽은 이서를 비상계단으로 불러내 건네는 선배 동현(양동근)의 언어도. “내가 회사 생활 잘하는 법 알려줄까? ‘왜’라고 생각하지 마. 아니, 그냥 생각 자체를 하지 마.” 대기업에 들어간 딸에게 건네는 이서 엄마의 조언도 비슷하다. “그런 일을 시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그러니까 아무 소리 말고 하라는 대로 해. 대기업은 대기업인 이유가 있는 거니까.”
돈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이서뿐만이 아니다. 이서의 선배인 동현도 그 놈의 동그라미 따위를 그리느라 이혼하고 자주 보지 못하는 어린 딸 서은(박예린)과 자주 놀아주지 못했다. 어린 시절 외계인을 도와준 보답으로 죽음 이후 12시간을 더 살 수 있는 능력을 받은 동현은 교통사고로 죽고 나서야 남은 시간을 딸과 보내고자 한다.
다단계 사업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다 사업이 망해 빚더미에 앉고 충동적으로 동현의 차를 훔치는 해일(이홍내)은 말할 것도 없고, 망해버린 유튜브 채널을 되살리고 다시 한번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은 이발사 겸 유튜버 현숙(김재화)도 10억원이라는 거액의 후원금을 받곤 그에 호응하고자 애초의 ‘정의구현’이란 취지와는 거리가 먼 길을 걸어간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이후 벼랑 끝에 몰린 천웅(장동윤)이 거액의 상금을 노리고 현숙이 모집하는 ‘정의의 용사’가 되기 위해 벌이는 일도 결국 돈 때문이다.
‘사막의 왕’에서 돈으로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려는 문팰리스의 사장(진구)은 이렇게 말한다. “돈 주잖아. 의미가 뭐가 중요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돈은 언제나 필수불가결한 것이긴 했고, 그렇기에 대중문화에서 돈은 언제나 욕망을 상징하며 갈등을 야기하는 소재로 주요하게 다뤄져 왔다. 그럼에도 올해는 유난히 돈을 욕망하고 좇는 이야기가 두드러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제목부터 노골적이었던 최근의 화제작 ‘재벌집 막내아들’이나 가난한 세 자매가 700억원과 얽히는 이야기였던 ‘작은 아씨들’, 내부자거래로 인생 상한가에 도전하던 증권사 미화원들의 이야기인 ‘클리닝 업’ 등. ‘사막의 왕’은 ‘돈이 이유고, 의미’라는 삭막한 사막 같은 세상에서 군림하고 지배당하는 사람들 속에서 동현의 어린 딸 서은의 입을 빌려 “의미가 있어?”라고 묻는다. 새해 안부 인사로 무의식적으로 ‘대박나세요’라는 인사를 하고 ‘OO는 모르겠고, 돈은 벌고 싶어’ 류의 제목을 단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 블로그든 유튜브든 인스타그램이든 스마트스토어든 뭐든 상관없으니 큰 수익을 올리면 장땡이라는 우리, 이제 좀 진지하게 물어볼 때가 아닐까. 의미가 있어?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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