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마지막으로 직장 내 성희롱으로 고민중인 잠재적 신고인들에게 현명하게 자기 방어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고자 한다.
30대 초반의 A는 상급자인 B로부터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몰래 촬영을 당해왔다. 업무지시를 내리거나 여럿이 대화 하는 중에도 B의 휴대폰 카메라는 늘 A를 향해 있었고, 일을 하다가 PC 모니터에 자신을 촬영중인 B의 모습이 비친 적도 수차례 있었다. 처음에는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1년이 넘게 B의 께름칙한 행동은 반복되었고 A는 이 사실을 동료들에게 털어놓았다. 이후 동료들도 B의 행동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는데, B의 휴대폰이 A에게 노골적으로 향해 있는 상황을 반복해서 목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촬영하는 것 같다'는 심증만 있을 뿐 정확한 물증이 없었기에 A는 B에게 직접적인 거부의사를 밝히거나 항의 하지도, 신고를 하지도 못한 채 1년이 넘는 시간을 참아야 했다. 아니, 조용히 칼을 갈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다.
B의 행동은 점차 대범하고 노골화됐다. 결국 B가 휴게실 창문너머로 A를 촬영하는 모습이 동시에 목격되었고, A는 이를 계기로 성희롱 고충신고서를 접수했다. A와 목격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B와 면담을 진행했고 당연히 B는 모든 사실을 부인했다. 여기서 안타까운 점은 인사팀은 고충창구일 뿐, 수사기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B에게 휴대폰 제출을 요구하거나 컴퓨터 등의 저장매체를 압수 수색할 수도, 디지털 포렌식으로 메모리를 복원할 권한도 없다. 그저 신고인과 피신고인, 그리고 주변 관계자들을 수차례 면담하고 그 과정에서 누구의 말이 사실에 근접한지, 개연성이 높은지 보강증거를 찾는 수 밖에 없다. 피해자 중심의 성인지 감수성도 갖고 있어야 하지만, 공정한 인사권(징계권) 행사인지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균형잡힌 대응을 해야 후에 탈이 없다.
결론적으로 B의 성희롱 사실은 인정되었고, 중징계 처분되었다. A는 1년여 간 몰카 정황이 있을 때마다 그 상황의 고충을 동료는 물론, 자신의 지인들에게 토로했으며 자신이 소속된 전문단체 협의회, 노동조합, 관내 노동청, 노동인권센터, 경찰서 등을 찾아가 상담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A의 동료들 역시 비슷한 상황을 목격하거나 발견했을 때 자신의 배우자, 혹은 지인 등에게 상황을 전달하는 카카오톡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 모든 사적 대화까지 갈무리하여 증거로 제출했다. B는 마지막까지 억울하다는 입장이었으나 본인의 억울함을 입증할 어떤 증거도, 대변해 줄 확인자도 한 명 없이 앵무새처럼 혐의사실 부인만 반복했다.
그나마 직장 내 몰카의 경우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고, 구체적이고 일관된 진술, 신고인이 거짓말 할 동기가 없다는 점만으로도 신고인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다. 그러나 성폭력특별법에서 몰카를 불법적으로 규정하고 있고 높아진 시민의식 덕에 몰카범들이 현행 체포되는 경우가 많다고 해도, 생각보다 무혐의/무죄 처분되는 경우가 많다. 촬영에 대한 증거수집이 적법했는지(그래서 권한없는 자가 압수하면 안된다), 촬영 내용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였는지(그래서 레깅스 촬영은 항소심에서 무죄 처분 받았다. 대법에서는 유죄판결 되었으나), 체포 방식에서 원칙과 절차를 제대로 거쳤는지, 보강증거가 있는지 등으로 다투는 것이다. 지금도 초록색 검색창에 '몰카 현행범'으로 입력하면, 어떻게 무죄판결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 얼마큼의 승소율을 갖고 있는지 사례를 자랑하는 법무법인의 광고글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사팀이나 고충창구를 찾기 전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육하원칙에 입각한 구체적인 신고 사실, 그리고 이를 객관적으로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증빙자료이다. 객관적 증빙자료를 얼마나 많이, 얼마나 확실하게 준비할 수 있는지가 힘들고 지리멸렬한 싸움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가장 좋은 것은 녹음, 녹취자료인데 녹음 기능을 항상 켜고 다닐 수도 없고 문제 상황에서 정신차리고 ‘이제부터 증거채집을 위해 녹화(음)해야지’ 라고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이런 증빙자료를 준비하기란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 상대방의 동의없이 무분별하게 녹음하거나 촬영하는 행위 자체가 또 다른 불법행위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내 편에서 사실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객관적인 진술자(목격자)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같은 팀원은 물론이고 옆 팀 동료나 선후배, 필요하다면 퇴직자들까지. 특히, 성 관련 사건의 경우에는 위 사례와 같이 그 일이 벌어진 시점에 즉시 제3자(배우자나 가족, 친지 등)에게 문제 상황을 공유하거나 고충을 상담하는 것이 좋다. 후에 이런 기록들이 당시의 정황을 입증하는 증빙자료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든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어 나를 대변하게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제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성희롱 사건을 조사하고 면담하는 과정에서 특정 일방에 치우쳐 옹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고자도 피신고자도 직장동료이기 때문에 섣불리 누구의 편을 드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 면담자체를 거부하는 경우도 꽤 된다. 그러니 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목격했거나 아는 범위 내에서라도 진술해 줄 수 있을 정도의 호의적인 관계면 충분하다. 하물며 ‘직장관계의 99%는 관계다’라는 책도 있지 않은가. 고충신고서를 접수하기에 앞서 누가 나를 위해 진술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 김진은?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을 합쳐 3000명에 달하는 기업의 인사팀장을 맡고 있다. 6년간 각종 인사 실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비법을 ‘알아두면 쓸데있는 인사 잡학사전’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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