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정부와 국회가 가상자산 시장에 본격적으로 칼을 빼 들고 나섰다. 올해 들어 가상자산 업계를 향한 불신이 커진 가운데, 대형 거래소였던 FTX가 순식간에 무너지자 규제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기 때문. 최근 시장에 공포감이 팽배한 만큼 업계도 규제에 협조적인 모습이다.
#가상자산 규제 법제화에 나선 국회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가상자산 시장을 제도권에 편입해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전 정부와 달리 기업 규제를 완화하고 민간 시장의 역할을 활성화하겠다는 기조를 내세운 만큼 가상자산 업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회 주도로 전문가와 업계 인사가 모여 가상자산 시장 진흥을 위한 공론장을 꾸준히 마련해왔다.
하지만 출범 6개월이 지난 지금 분위기는 백팔십도 달라졌다. 정부와 국회는 대통령 공약과 달리 시장 활성화보다 투자자 보호와 규제 강화가 시급하다는 쪽으로 돌아섰다. 지난 16일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은 원화 거래가 가능한 5대 가상자산 거래소(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 고팍스)의 대표이사를 불러 간담회를 열었다. 가상자산의 자금세탁 방지 체계와 자산 보관·관리 현황을 묻기 위해서다. 앞서 11일(현지시각) 글로벌 가상자산 거래소 FTX가 파산보호 신청하면서 연쇄 충격이 올 것이라는 공포가 시장을 엄습했다.
FTX는 자체 발행 가상자산인 FTT와 관련한 의혹이 제기된 후 10일도 채 지나지 않아 유동성 위기를 맞고 순식간에 파산까지 내몰렸다. 세계 3위 안팎의 큰 거래소였던 FTX에 투자한 기업·기관이 많은 데다 국내에도 많은 투자자가 이용한 만큼 FTX 사태로 인한 피해가 작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실제로 16일 국내 거래소인 고팍스의 예치 서비스 ‘고파이’에서 출금 지연 사태가 발생했다. FTX 파산 여파로 고팍스 협력사 ‘제네시스 글로벌 캐피탈’의 신규 대출·환매가 중단되면서 고파이까지 불똥이 튄 것.
이렇다 보니 간담회에서 금융정보분석원은 “가상자산 거래소 이용자를 보호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며 “고객 자산의 보관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거래소가 자체 발행한 가상자산의 안전성을 면밀히 모니터링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이용자 보호에 필요한 사항은 국회 법안 심사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도 밝혔다.
금융정보분석원이 이용자 보호를 강조하자 거래소들은 “FTX 파산과 같은 일은 우리나라에선 발생하기 어렵다”라고 반박했다. 거래소 측은 “FTX 사태 본질은 경영진이 고객 자산을 부당하게 유용하고 자체 발행 가상자산인 FTT를 악용한 것”이라며 “국내에선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에 따라 사업자의 가상자산 발행이 제한되는 등 제한이 있다”고 반론을 펼쳤다.
금융당국은 간담회 전날(15일)에도 공시 강화 방안을 발표하며 시장 감독에 나섰다. 가상자산 사업과 관련해 정보를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당국은 공인회계사회와 손잡고 거래소·발행처·보유자가 가상자산 발행, 보유량 등을 담은 주석을 작성하도록 기준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가상자산의 회계처리와 감사를 위한 가이드라인도 만들어 배포할 예정이다. 기업의 실제 가상자산 보유량과 블록체인상 기록이 일치하는지, 매각 거래 사실이 있는지, 자체 보유량과 고객 위탁분은 얼마인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금융당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배경에는 가상자산 규제 법안이 있다. FTX 파산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10월 31일)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 등은 ‘디지털자산 시장의 공정성 회복과 안심거래 환경 조성을 위한 법률안(디지털자산법)’을 발의했다. 이는 지원보다 규제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그동안 윤 의원이 규제와 더불어 시장 진흥에도 무게를 뒀던 것과는 다른 행보다. 가상자산과 관련해 대규모 피해가 이어지자 일단 규제부터 마련하려 나선 것.
법안 발의 이유에도 “2018년 1700억 원 수준이던 불법행위 검거규모가 지난해 3조 1300억 원으로 18배 이상 급증했다”라며 “글로벌 기준을 무작정 기다리기보다 최소한의 규제로 이용자 보호 규율 체계를 우선 마련하고 추후 이를 보완해가는 입법 추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라고 밝혔다.
법안은 금융위원회에 디지털자산위원회를 설치하고 시장 사업자를 감시·감독하는 권한을 부여한다. 이에 따라 금융위는 검사, 조사 권한, 시정명령, 영업정지, 수사기관 고발 등 사업자에게 각종 제재를 할 수 있다. 불공정거래행위를 한 회사나 개인이 적발될 경우 취득한 재산을 몰수·추징하는 내용도 담겼다.
야당에서도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지난 10일 ‘가상자산 불공정거래 규제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에 따라 가상자산을 정의하고, 사업자에게 감시·신고의무를 부과한다. 금융위에 시장 감시·감독 권한을 부여하거나 불공정행위의 벌칙을 규정하는 것 등은 여당이 발의한 내용과 동일하다.
# 가상자산 지갑 주소 공개한 코빗
이 같은 상황에 업계는 ‘받아들이자’는 반응이 우세하다. 5대 거래소 중 하나인 코빗은 발 빠르게 대책을 냈다. 16일 업계 최초로 거래소가 보유한 가상자산 수량과 지갑 주소까지 언제든 볼 수 있게 공개한다고 발표한 것. 특히 금융정보분석원과의 간담회 직후 나온 결정이라 더욱 주목을 받았다.
코빗 측은 “국내 원화마켓 거래소가 회계 감사를 거쳐 가상자산 보유 현황을 분기별로 공시하지만, 보유 수량을 매일 공개하지 않아 회계 감사 기간에만 자산을 보유한다는 의혹을 받았다”라며 “이번 결정으로 우려를 불식할 수 있다”며 자사의 투명한 운영을 강조했다.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는 “현재 국내 거래소들은 법규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수량 공시를 하는 상황이다. FTX와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지나친 우려라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국내에선 가상자산 사업을 하려면 신고 후 수리를 거치는 만큼 해외에 비하면 규정이 이미 엄격한 편”이라면서도 “그런데도 시장에 투자자가 늘고 규모가 커진 만큼, 가상자산을 법제화하고 규제를 마련하는 것 자체는 긍정적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규제 입법화를 적극 반기는 곳도 있다. 한국디지털자산사업자연합회(KDA)는 2일 “디지털자산법 발의를 환영하며 올해 중에 국회에서 통과하길 촉구한다”고 성명을 냈다. 강성후 KDA 회장은 “금융당국과 의회가 제도 입법에 속도를 내야 한다”라며 “규제라기보다 가이드라인 마련, 인프라 구축이라고 생각한다. 대다수 코인에 사기성이 있고, 투자자 보호 등의 논란은 디지털자산법을 제정하면 해결될 것”이라며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책임 주체를 두는 것을 정부의 시장 개입이라고 볼 수는 없다. 기준을 마련하면 산업 경쟁력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답했다.
심지영 기자
jyshim@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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