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내친 김에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처음 맡았던 징계사건 또한 성희롱 사건이었다. 직장 내 성희롱이 뭐 그렇게 많냐고 묻지 말기 바란다. 실제로 정말 많이 일어난다. 20대 중반의 이 사건 신고인은 40대 후반의 상급자가 지난 1년간 지속적으로 “주말에 뭐하냐, 애인 만났냐, 나랑 데이트 할래?”, “(뒤에서 껴안으며) 요즘 살쪘어?” 등의 언어적 성희롱을 하고, 손등을 쓰다듬는 신체적 접촉을 하거나, 근무시간 중에 기분이 나쁘다며 상스러운 욕설을 뱉는 등 지위를 이용해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며 신고서를 접수했다.
그저 흔한 성희롱 사건일 수도 있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남성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위의 언행을 되짚어보자. 과연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피신고인은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오해라며 펄펄 뛰었다. 평소 신고인과 친해 장난삼아 했던 말이었다, 아무런 성적 의도가 없었다, 일부 행동은 전혀 없는 사실이거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오히려 최근 업무 부진과 관련해서 부서에 주의를 몇 차례 주었는데 이에 앙심을 품고 신고인과 부서원들이 집단으로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펼쳤다.
인사위원회에서도 동성 간에 친밀감을 표현한 짓궂은 장난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일부 나왔다. 신고인 혹은 피신고인이 사실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걸로 소문이 파다했다는 ‘카더라’성 이야기도 오갔다. 인사팀장은 실무 간사로 위원회에 참석하기는 하나, 의결권 및 발언권은 없다 보니 위원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몹시 당혹스러웠다. ‘신고인과 피신고인 당사자의 성별,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 등은 징계 유무와 양정을 판단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별개의 사실로 두어야 한다’는 대원칙을 갖고 업무를 처리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의결권을 가진 간부들 일부의 생각이 저러하다니. 그런 발언조차 신고인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음을 알고나 있는지 낯 뜨거웠다. 다행히 변호사, 노무사 등의 외부 전문위원들이 객관적인 관점에서 의견을 개진했고 피신고인은 중징계 처분을 받았다.
2018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직장인 남녀 3000명을 대상으로 ‘직장 성희롱 실태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노동자 중 29%(남성 25%, 여성 34.4%)가 주 1회 이상 직장에서 성희롱을 경험했다. ‘경험해본 적이 있다, 없다’ 가 아니라 10명 중 3명꼴로 ‘주 1회 이상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남성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 성비는 남성 86.4%, 여성 13.6%, 여성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 성비는 남성 78%, 여성 22%로 남성이 동성에게 당하는 성희롱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성희롱이 발생했다고 가해자가 무조건 남성이 아닌 것처럼, 피해자가 꼭 여성이라는 법도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성인지 감수성’이라 함은 사회통념상 약자일 수 밖에 없는 피해자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다.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직장에서 결재권을 갖고 있는 중간 관리자급 이상이라면 옥상이나 흡연실에서 ‘담타’를 가지면서, 혹은 탕비실에서 오랜만에 마주쳐서 반갑다며, 출퇴근시간에 오가면서나 회식자리에서, 친근함을 빌미로 이성은 물론이거니와 동성에게도 도가 지나친 장난이나 성적인 농담, 음담패설은 삼가하기 바란다. 아무리 가까운 부하직원, 선후배, 동료라도 이곳이 직장임을 잊지 말자. 친근함의 표현은 ‘균형 있는 R&R(Roles & Responsibilty)’, ‘연장근로 없는 정시퇴근’, ‘아묻따 휴가결재’로 충분하다.
얼마 전 회식자리에서 이제는 꽤 친해진(사적인 질문을 할 정도의 친분을 쌓는 데 무려 1년이 걸렸다) 20대 초반의 막내팀원에게 “남자친구 있어요?” 라고 질문했다가 돌아온 대답에 완전히 허를 찔렸다. “팀장님, 요새는 그렇게 성별 특정해서 질문하시면 안돼요. 만나는 사람 있는지 물어보셔야죠. 물론 저는 지금 싱글이고, 이성애자입니다만.”
이제는 Z세대들과 대화할 때 젠더와 PC(Politically Correct,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에 근거한 언어사용이나 활동을 바로잡고자 하는 운동)까지 고려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아직도 배움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필자 김진은?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을 합쳐 3000명에 달하는 기업의 인사팀장을 맡고 있다. 6년간 각종 인사 실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비법을 ‘알아두면 쓸데있는 인사 잡학사전’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단독] 서인천새마을금고, '갑질' 논란 이어 '성희롱' 의혹까지…비위 백태 점입가경
·
[알쓸인잡] 직장 내 성추행에 대처하는 MZ 직원의 자세
·
한국미쓰도요,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 사건 부적절 대응 물의
·
경기도 공공기관 요직에 뇌물 경찰·상해치사·성희롱 인사 등용 구설
·
8월 줌 유료화 앞두고 서울 교육청 ‘예산 없다’…현장 혼란 불가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