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모두가 슬픔에 잠겨있는데 속에 있는 말을 어떻게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바라는 것이 있다면 상인들이 살 수는 있는 여건을 만들어줬으면 합니다. 참사의 슬픔으로 우리도 참 많이 울었는데….”
참사가 발생한 지 13일이 지난 10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조성된 시민 추모공간에는 여전히 애도를 표하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국화꽃을 무겁게 내려놓는 시민들 뒤로 노란 조끼를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추모공간을 정돈하러 온 인근 주민들이다. 추모공간 앞으로 조성된 우회로를 지나는 시민들도 희생자들을 기리는 메모지에 시선을 옮기며 발걸음을 늦췄다.
그러나 해밀톤호텔 뒤편 세계음식거리 골목은 적막했다. 경찰 조사로 열흘이 넘도록 사건이 발생한 골목의 통행이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행인이 없는 휑한 거리에는 점원 몇 명만이 나와 그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서울시에서 최초로 지정된 관광특구라는 이름이 무색했다. 현장 출입을 통제하던 한 경찰은 “조사가 끝나면 통제를 해제할 것 같지만, (해제 시점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며 “현재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2차 조사(현장 감식)까지 끝난 상황인데, 유품 정리나 청소 등을 구청과 경찰이 조율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는 지난달 30일 용산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지만, 지자체에서는 실태조사 한 번 나오지 않았다. 상인들은 통행 통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정부 및 지자체의 지원이나 손실 보상이 있을지 알 길이 없다. 경찰은 지난 10일 이태원 사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을 통해 “사고 현장 통제로 피해를 본 인근 주민이 손실 보상을 청구하면 심의를 통해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삶의 터전에서 참혹한 상황을 목격한 인근 상인들의 트라우마는 심각하다. 지난 5일까지 자발적으로 휴점하며 애도 기간을 가졌지만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지 못했다. 길목 곳곳에 붙은 ‘마음 쉼 카페(재난 심리지원 카페)’ 포스터가 이를 대변하는 듯했다. 사비를 털어 희생자 유족과 시민에게 조화를 나눠주는 가게도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이 더 막막하다. 참사 현장 인근에서 40년간 양복점을 운영해온 나 아무개 씨(74)는 참사의 충격과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가게 걱정을 해야 했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제 막 해제되면서 가을 장사를 기대하며 들여온 물건들은 아직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참사 이후 이태원을 찾는 발길이 뚝 끊겼기 때문이다.
나 씨는 “매일 추모공간을 지나 출퇴근 한다. 가게 문을 나서면 참사의 슬픔이 그대로 남아있다”며 “서울 한복판에서 이 같은 참사가 발생한 것을 믿기 어렵다”고 전했다. 이어 “참사로 인한 국민적 충격과 트라우마도 걱정이지만, 이태원이라는 지명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각인되는 것도 걱정이다. 지자체가 지금은 우리를 신경 쓸 겨를이 없겠지만, 추후에라도 사태 마무리를 위해 정부나 지자체에서 나서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이태원 퀴논길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김 아무개 씨(39)도 어려움을 호소했다. 김 씨는 “코로나19 사태 때에도 클럽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이태원이라는 지명 자체가 두려움의 온상처럼 비쳤다”며 “당시 상권이 죽다시피 했는데, 이제 회복하려던 차에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서 손님이 완전히 끊겼다”고 말했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얼어붙은 용산구 상권은 회복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서울신용보증재단 소상공인정책연구센터에 따르면 서울시 전체 상권 월평균 매출액은 지난 2분기 기준 9조 538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712억 원 증가했다. 반면 용산구의 지난 2분기 월평균 매출액은 5052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94억 원 감소했다. 특히 이태원은 서울시내 상권 중 코로나 팬데믹에 가장 취약한 상권으로 꼽혔다. 저녁 매출 의존도가 높고, 외국인 관광객의 집중도가 높기 때문이다.
이태원 인근의 경리단길, 해방촌 일대 역시 상황이 여의치 않다. 주민들이 이용하는 상점은 피해가 덜하지만, 주말 손님이나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하던 가게들은 직격타를 맞았다. “오늘은 가게에 손님이 있느냐”는 질문이 상인들 간에 안부 인사가 됐을 정도다. 이태원이라는 지명에 또 다시 부정적인 이미지가 드리우면서, 한남동 인근에 위치한 일부 상점들은 이태원동으로 등록된 주소지를 한남동으로 옮기는 방안까지 고려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치권에서는 ‘이태원 참사’가 아닌 ‘10·29 참사’라는 명칭을 사용하겠다는 움직임도 나온다. 김동연 경기지사는 10일 오전 경기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전관리체계 개선 방안을 발표하며 “이태원 참사 대신 ‘10·29 참사’라는 명칭을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이태원이라는 명칭을 쓸 때 인근 주민들과 상인들, 시민, 외국인 관광객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효과를 미칠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김 지사는 “참사를 상기시켜 트라우마를 일으키거나 해당 지역의 경제활동이 지장을 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정부의 미온적 대처로 그간 합동분향소 명칭을 두고 때 아닌 논란이 불거지는 것을 지켜보던 상인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태원 인근 한 부동산 관계자는 “이태원이라는 명칭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역사가 깊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지명”이라며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태원 참사 대신 지명을 뺀 ‘10·29 참사’로 칭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행정안전부는 각 시·도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설치 관련 공문을 보내면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로 표시하라는 지침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추모 분위기를 축소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자 뒤늦게 ‘참사’, ‘희생자’ 표현을 사용해도 된다고 밝혔다. 이에 서울시는 합동분향소 운영 마지막 날인 지난 5일 뒤늦게 명칭을 변경해 질타를 받았다.
여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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