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흥국생명이 2017년 11월 발행한 5억 달러 규모의 해외신종자본증권을 예정대로 조기상환(콜옵션) 한다고 밝혔다. 흥국생명은 지급여력(RBC) 비율이 정부 권고치인 150%를 밑돌 수 있어 콜옵션 행사를 미뤘는데, 금융시장 혼란 등을 고려해 자금 확충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신종자본증권이란 주식과 채권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하이브리드채권으로 만기가 매우 길거나 없는 특성이 있어 영구채로도 불린다. 재무제표에도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등록되는 특성이 있다. 하지만 국내 발행사 대부분 ‘콜옵션’을 통해 중도상환을 해왔다.
국내에선 콜옵션을 통해 5년 후에 이 신종자본증권을 재매입하는 게 불문율로 여겨졌다. 하지만 흥국생명이 9일 만기가 도래하는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고 내년 5월까지 기간을 미루며 시장 내 불문율이 깨졌다. 국내에서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은 건 2009년 우리은행의 후순위채 미행사 이후 13년 만의 일이다.
흥국생명을 시작으로 DB생명도 13일 만기가 도래하는 300억 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행사를 내년 5월로 변경하며 채권시장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다만 흥국생명은 콜옵션 미행사로 인한 논란이 번지자 일주일 만에 콜옵션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생보사들이 콜옵션을 미룬 까닭은 신종자본증권을 새롭게 발행하는 것보다 콜옵션을 미행사해 기존 신종자본증권을 이끌고 가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유승우 DB투자증권 연구원은 “흥국생명이 신종자본증권을 교체 발행하려면 10% 넘는 금리로 조달해야 하지만, 콜옵션 미행사 시에는 금리가 조정되더라도 6%대로 오르는 데 그친다”고 설명했다.
실익을 고려한 판단이었지만 채권시장에서는 국내 금융회사들이 발행하는 외화표시채권의 가격이 급락하며 신뢰가 무너진 모습을 보였다.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4일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미행사로 한국 보험사들의 자금 조달 여건이 악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레고랜드 사태 이후 국내 자금시장이 급격히 위축돼 금융당국이 해외 조달을 권고한 상황인데, 이번 콜옵션 미행사로 글로벌 채권시장에서 국내 회사 발행 외화표시채권의 가격이 급락했다.
흥국생명이 콜옵션 미행사 결정을 번복하기 전 국내·외 외화채권시장에서 액면가 100달러인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은 4일 72.2달러까지 하락했다. 10월 말 콜옵션 미행사 공시 직전 99.7달러에서 약 30% 하락한 셈이다.
다른 금융회사들의 신종자본증권 가격도 급락했다. 2024년 10월 콜옵션 만기인 우리은행 신종자본증권은 같은 기간 87.5달러에서 77.8달러로 떨어졌으며 2025년 9월 만기인 동양생명 신종자본증권은 83.4달러에서 52.4달러까지 떨어졌다.
흥국생명의 번복에 시장은 일단 안도하는 모습이다. 72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던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가격은 98달러 수준까지 다시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금리 인상으로 인해 신종자본증권 발행사들이 콜옵션 미행사를 고려해봤을 법한 상황이었지만, 이번 흥국생명 사례로 신종자본증권 발행사들이 콜옵션을 미행사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졌다. 다만 흥국생명의 채권 가격은 만기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회복세가 빠른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를 회복하기까진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같다”고 설명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도 8일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지금 전 경제 분야에서 언제 어디서 돌발적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대응이 늦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 흥국생명 건은 대주주가 증자하기로 했고 콜옵션도 원래대로 발행하기로 하며 수습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DB생명은 콜옵션 연기를 고수하고 있다. 금융권에선 외화채가 아니고 규모도 작아 흥국생명보다 파장이 적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정동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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