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해 여름, 20대 중반의 여직원이 고객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며 고충 면담을 요청해왔다. 3교대 근무를 하는 사업장 특성상 야간근무 시 고객과 단둘이 대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해자가 여직원의 신체 특정 부위를 움켜쥔 것이다. 사건 조사와 가해자 사과를 요구하겠거니 했던 나는 이 젊은 직원의 요구사항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추행 사실은 사건 발생 다음 날 상급자에게 즉시 알렸고, 고객과 고객의 보호자로부터 정식 사과도 이미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사팀장인 나를 찾아온 이유는, 담당을 교체해 가해자와 자신을 분리해달라는 요청을 상급자가 무시하고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데 네가 너무 유난을 떤다”라고 말하는 등 2차 피해를 가했으니 이에 대한 상급자의 정식 사과와 적절한 조치를 바라서였다.
문득 15년 전 일이 떠올랐다. 세 번째로 이직한 직장에서 내가 처음 맡은 일은 회사 홍보영상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앞선 두 직장이 홍보대행사였기에 ‘을’에서 ‘갑’으로 위치는 바뀌었지만 ‘을’의 마음가짐으로 프로젝트에 임했다. 전국 사업장을 돌며 촬영을 하고, 편집실과 녹음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제작사 스태프들과도 친분을 쌓았다(고 믿었다). 영상제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회식자리에서 제작사 PD는 단골 가게에서 2차를 하자고 권했고, 나 역시 따라갔다.
동료들이 자리를 비우고 단둘이 남은 상황에서 그 PD는 부적절한 말을 하며 손으로 내 신체를 만지며 추행했다. 자리를 박차고 나오며 느낀 감정은 당혹감과 분노, 굴욕감과 혐오, 그리고 놀랍게도 ‘죄책감’이었다. 40대 유부남 PD와 허물없이 친하게 지낸 점, 2차 술자리를 쫓아간 점, 동료들이 자리를 비울 때 같이 일어서지 않은 점에서 내게도 일부 잘못이 있다고 자책하고 후회했던 것이다. 결국 회사 누구에게도 사실을 알리지 못했고, 가해자에게 문제 제기도 못 한 채 회피하는 방법으로 그 사건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자신이 겪은 일과 상급자, 가해자의 인적 사항, 자신의 요구사항을 빽빽하게 적은 메모지를 꺼내 침착하게 읽어 내려가는 여직원의 모습 위로 15년 전 그 사건이 겹쳤다. 떨리는 목소리로 면담을 마친 그 직원에게 그녀의 행동이 얼마나 용기 있고 대단한 것인지 내 경험에 빗대어 들려주었다. 내가 겪은 일을 제삼자에게 털어놓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후 신고인의 직상급자(50대 초반 여성)와 신고인 소속 부서의 최고 임원(50대 후반 여성)과 연달아 면담을 진행했다. 예상대로 상급자는 자신이 직장 내 성희롱의 2차 가해자로 피신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그들에게 피해자의 ‘유난’이 왜 필요한지를 이해시키고 어렵게 부서 이동과 공식사과 등의 업무 조치를 취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여성 근로자’임에도 그동안 얼마나 가해자의 관점에서 동료를, 후배를, 자신을 몰아세웠는지 돌이켜보았다. 직장 내 성희롱을 참고 넘어간 피해자들 대다수는 아마 과거의 나처럼 스스로에게서 잘못을 찾거나, 혹은 신고 이후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 듣고 겪게 될 동료나 상급자의 2차 가해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선택했을 것이다. 마치 오랜 기간 폭력에 노출되어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피해자가 은연중에 자신에게서 폭력의 당위성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이 필요한 것이다.
지난 6월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2021년 성희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 피해 경험률이 3년 전 조사에 비해 감소(8.1%→4.8%)했고, 피해에 대한 대처행동으로 ‘참고 넘어감’ 응답비율(81.6%→66.7%)도 감소했다. 참고 넘어간다는 피해자가 여전히 10명 중 7명으로 과반수 이상이라고는 하나,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20대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젠더교육과 인권교육을 받았고 2017년 이후 미투운동을 직접 보고 겪은 세대다.
이들은 조용히 참고 넘어가는 피해자가 되기보다는 아주 세세하게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학습했고,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되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만큼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은 그 사례나 적용범위가 광범위해질 것이 자명하다. 이제 우리는 본인이 정말 ‘성인지 감수성’이 있는지, ‘숨은 꼰대’는 아닌지 유사한 사례에 빗대어 스스로를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가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고 제자리에서 일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필자 김진은?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을 합쳐 3000명에 달하는 기업의 인사팀장을 맡고 있다. 6년간 각종 인사 실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비법을 ‘알아두면 쓸데있는 인사 잡학사전’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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