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가볍게 시간을 때우고 싶을 때, 넷플릭스의 하이틴물을 보는 것처럼 안전한 선택이 없다. 해피엔딩이 정해져 있는, 귀염뽀짝한 청춘들의 달달한 애정 행각과 성장을 보는 것만큼 무해하고 부담없는 선택이 또 있을까.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키싱 부스’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하이틴과는 백만 광년 떨어져 있어서 거북하다면 첫사랑 판타지를 자극하는 대만 청춘 로맨스물도 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나의 소녀시대’ ‘안녕, 나의 소녀’ 등은 지금의 30대 후반~40대인 중장년층의 아련한 추억을 복기하게 만든다. 지난 10월 21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20세기 소녀’는 두 부류의 짬뽕이다.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하지만 10~20대의 시선도 붙들고자 한다.
‘20세기 소녀’는 사실 클리셰 범벅이다. 심장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절친 연두(노윤서)를 대신해 연두가 한눈에 반한 소년 백현진(박정우)를 관찰하는 보라(김유정)가 주인공으로, 백현진에 대해 알아내려다 그의 절친인 풍운호(변우석)와 삼각관계로 얽히게 된다. 예쁘지만 지극히 털털하여 평범하게 묘사되는 여주인공, 은근히 인기 많은 요소를 지녔음에도 여주인공만 바라보는 남주인공들, 오해와 오해가 겹쳐져 이뤄지는 삼각 아니 사각관계,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흔들리다 내리는 잘못된 판단 등 모든 요소가 숱하게 보아온 것들이다.
특이점이라면 갓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17세 소년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되, 시대 배경은 그 이름도 찬란한 세기말인 1999년으로 정했다는 것. 그러니까 보라는 비롯한 주인공들은 대개 1983년생으로, ‘20세기 소녀’를 시청하는 2022년 현재는 마흔일 터다. 솔직히 말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 영화를 끊지 않고 볼 수 있는 것은 주인공들과 같은 연령대인 시청자들이 대중문화 소비력이 뛰어난 30대 후반에서 40대란 점이 주효했다고 본다. 완연히 늙어 무뎌지진 않았으나 아직은 마음 한 켠에 ‘소녀 감성’과 ‘소년 감성’을 간직하고 있을 나이인지라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추억을 반추하기 좋은 타이밍인 셈이다. 올해 상반기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70년대 후반생과 80년대 초반생의 마음을 강타했던 것처럼.
1999년에 태어난 김유정과 2000년에 태어난 노윤서, 1999년에 어린이였던 변우석과 박정우 등 주연을 맡은 MZ세대 배우들은 올드하기 짝이 없는 이 영화를 따스하고 그리운, 몽글몽글한 감성으로 만드는 주역들이다. 사랑스러운 소녀 보라 그 자체인 듯한 김유정은 연기도 열일하고, 미모도 열일하여 중장년층은 물론 지금의 10~20대도 감응시킨다. 하기야 시대가 달라져도 10대 후반의 오롯한 감성은 언제나 비슷할 테니까. ‘청춘기록’에서 느긋하지만 불안정한 청춘을 잘 표현했던 변우석도 ‘첫사랑 재질’ 그 자체다.
또 하나 특이점은 그간 대중문화에서 그리 많이 비쳐진 적 없는 ‘청주’라는 지역성을 잘 살렸다는 점. 삐삐, 공중전화 부스, 비디오 가게, 토이 등 90년대를 상징하는 디테일한 요소는 그간 있었던 수많은 90년대 배경의 드라마와 영화로 익숙하지만 수도권 혹은 부산권이 아닌 충청도 청주라는 지역성은 제법 신선하다. 연출을 맡은 방우리 감독이 청주 출신이라 그런지 무심천, 중앙공원, 청대뒷길, 우암동, 본정통, 파라다이스 등 그 시절 청주를 살았던 이들의 반가움을 살 법 하고, 감독이 예능 ‘서울촌놈’ 청주 편을 보고 섭외한 게 아닐까 싶은 청주 출신 한효주와 이범수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재미났다.
어쨌거나 끝까지 ‘20세기 소녀’를 시청했지만, 보고 나서 마음 속에 드는 의문은 하나다. ‘90년대 추억팔이는 언제까지 통용될까?’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하는 데에도 적합한 연령대가 있다. 자아가 성립되고 여러 관계를 도모하며 추억이 될 경험을 쌓기 시작하는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가 대체로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나서 추억하는 연령대다. 나이를 아주 많이 먹고 노인이 되었다고 해도 특별히 4~50대를 추억할 것 같진 않거든(‘난 40~50대가 가장 빛나는 시대였는데?’라고 반문하실 어르신들이 계시다면, 죄송하다. 아직 50대 이상이 되어보지 못해서 모르는 걸 수도 있다).
이른바 청춘이라 불리는 시절에 느긋한 시선을 보내며 그리워하는 건 어느 세대고 마찬가지일 테지만, 길게는 10년 전부터 불은 90년대를 향한 복고바람은 이제 좀 지겹다. 내가 ‘수년째 90년대 복고바람이 심상치 않다’며 90년대 문화에 대한 기사를 썼던 게 2014년의 일이다. 10년 가까이 끊이지 않는 복고바람은 지겨울 만하지 않나? 90년대가 한국사회 대중문화의 르네상스 시기였으니 그럴 법은 하지만, 현재의 시대감성과 연결한 영리한 고민과 시선이 없다면 추억팔이에 불과한 것 아닌가.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20세기 소녀’는 지난주 넷플릭스 세계 시청 순위 3위에 올랐다. 물론 외국에겐 이 추억팔이가 신선할 수 있다. 그러나 영리하지 않은 추억팔이는 앞으로 외면당할 수 있음을 ‘20세기 소녀’는 여실히 보여준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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