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채권시장 블랙홀로 떠오른 한국전력(한전)으로 인해 민간 기업들의 ‘돈맥경화’ 현상이 격화일로다. 중견,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이 대기업들조차 회사채 발행에 실패하며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천문학적 영업적자에 시달리는 한전은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한전채를 시장에 쏟아내고 있다. 한전채는 정부가 원리금을 지급보증하는 특수채로 국채와 동일한 신용등급(AAA)을 가진 초우량 채권이다.
한전은 향후 상환부담을 무릅쓰고 최근 연 6%에 육박하는 고금리를 제시한 한전채로 투자자 확보에 나서고 있지만 최근 유찰로 발행에 실패하는 굴욕까지 당했다. 한전채 상황이 이럴진대 신용등급이 좋은 공기업과 대기업도 사채 발행과 판매에 난항을 겪으면서 회사채 시장은 꽁꽁 얼어 붙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한전채 발행규모는 2020년 3조 4200억 원에 그쳤으나 지난해 10조 3200억 원으로 늘어난데 이어 올 들어 10월까지만 23조 3500억 원에 달한다.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과 맞물려 한전채 금리 역시 덩달아 급등세다. 올해 1월 4일 한전채 3년물 금리는 2.33%였지만 이달 금리는 5.9%대다. 10개월도 안 돼 금리가 2.5배 이상 뛰었다.
지난 25일 한전은 각각 한전채 2년 만기 2000억 원과 3년 만기 2000억 원에 대한 입찰을 진행했지만 2년물만 40%에 그치는 800억 원어치 발행에 그쳤다. 3년물은 아예 전체가 유찰되면서 발행조차 못했다.
채권 발행은 부채로 잡힘에 따라 한전채의 급증은 한전의 부채규모를 눈덩이처럼 키우고 있는 실정이다. 한전 부채 규모는 2016년 105조 원 규모였지만 올해 2분기에는 165조 8000억 원으로 급증했다.
한전이 무리수를 두고 한전채를 쏟아내는 이유는 천문학적인 영업적자로 인한 자금경색 때문이다. 한전은 2020년 영업이익 4조 863억 원을 거뒀지만 지난해 영업손실 5조 8601억 원으로 적자전환한데 이어 올해는 무려 40조 원 규모의 영업손실이 예상된다. 문재인 정부시절 행해진 거듭된 전기요금 동결,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 생산 전기 구매, 한전공대 설립 강행 등 복합적인 요인이 맞물려 있다는 평가다.
한전채의 범람은 다른 공공기관 특수채와 기업 회사채 시장을 강타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9월 기업 회사채 발행 규모 조달 실적은 16조 4480억 원으로 지난 8월보다 19.8%나 급감했다. 여기에 레고랜드 사태 여파까지 겹쳐 이번 달 회사채 발행 실적은 더 악화될 전망이다.
최근 AAA등급의 한국가스공사, 인천국제공항공사, 한국도로공사, 인천교통공사 등의 공사채와 AA+등급의 인천도시공사 공사채가 투자자를 찾지 못해 발행이 취소됐다.
대기업도 회사채 발행에 난항을 겪고 있다. 신용등급 AA인 LG유플러스는 이달 회사채 1500억 원 가량을 발행했으나 1000억 원 규모 주문만 받았다. 800억 원 규모 3년물은 연 금리 5.59%에도 100억 원 규모 주문에 그쳤다. 신용등급 AA-인 한화솔루션은 회사채 1500억 원 중 주문이 불과 130억 원에 그쳤다.
국채 3년물 금리가 이달 4%대, 한전채 3년물 금리가 6%에 육박하다 보니 투자자들이 회사채를 외면하고 있다. 기업들은 회사채 발행에 더 높은 이자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자금을 조달해도 향후 상환 부담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전기차 배터리 업체 SK온은 회사채 금리를 연 5.5%에서 7.5%로 올렸다.
회사채 시장뿐만 아니다. 기업들의 자금조달 통로인 은행대출 금리와 기업어음(CP) 금리가 치솟는 가운데 기업들이 1년 내 상환해야 하는 단기차입금 규모도 급증하고 있다. 한국은행(한은)에 따르면 비금융기업의 단기차입금은 지난 6월 말 기준 532조 5193억 원으로 역대 최대였다. 지난해 말에 비해 불과 6개월 사이 11.36%인 54조 3447억 원이나 급증했다. 은행 대출 등 단기대출금이 490조 3709억 원, 회사채·기업어음(CP) 등 단기채권이 42조 1484억 원에 달했다.
기업들에 대한 은행 대출 금리 상승도 가파르다. 한은에 따르면 예금은행의 8월 전체 기업대출 평균 금리는 연 4.46%다. 이달에는 연 5%대를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27일 기준 91일물 CP 금리는 전날에 비해 4bp 오른 4.55%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2009년 1월 20일 연 4.43%의 종전 최고치를 연일 다시 쓰는 중이다.
SK, 롯데, 효성그룹 계열사 등은 공모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지자 지난 8월 이후 신용보증기금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을 통해 겨우 자금을 조달했다. 신보 보증을 받는 P-CBO를 통한 자금조달 방식은 그간 중소기업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었는데 그만큼 대기업들의 자금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방증이다.
주요 대기업들은 올해 급격한 금리 인상 여파가 내년 상반기부터 본격 하강 국면으로 접어들어 경영 실적 악화로 이어질 것에 대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중소, 중견기업은 은행 대출, CP 발행은 물론 회사채 발행도 어려워져 극심한 자금난에 내몰렸다.
정부가 지난 23일 50조 원 플라스 알파 규모의 유동성 공급과 채권시장안정화펀드 등 정책자금을 동원하겠다고 했지만 시장에 만연한 공포감이 단기에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복수의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들은 “보다 적극적인 정책자금 지원과 글로벌 중앙은행들은 물론 한은의 기준금리 인상 폭이 둔화되지 않는 이상 투자자들의 시장 귀환에 따른 상황 반전은 쉽지 않아 보인다”고 입을 모았다.
정부는 채권 시장 안정 도모를 위해 올해 남은 기간 국고채 쏠림 현상 완화 차원에서 발행 물량을 대폭 줄이기로 했다. 기획재정부(기재부)는 다음달 경쟁 입찰 방식으로 발행할 국고채 규모를 총 7조 원으로 정했다고 27일 밝혔다. 이달 발행 계획인 9조 원 대비 2조 원이 적은 규모다.
올 들어 이달 현재까지 정부가 발행한 국고채 규모는 154조 원이다. 올해 발행 한도(177조 원)의 87%를 채웠다. 정부는 남은 두 달 동안 발행 여력인 23조 원을 줄여 물량 조정에 나설 것으로 관측된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지난 25일 “올해 글로벌 채권시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역사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남은 기간 중 재정 여력을 고려해 국고채 발행량을 당초 목표보다 과감히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한은은 27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채권시장 안정을 위해 다음 달 1일부터 3개월 간 한시적으로 적격담보증권에 은행과 공공기관 채권을 포함하기로 했다.
시중은행이 한은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때 현재 담보로 인정되는 증권은 주로 국채나 정부보증채 등 국공채인데 이를 확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회사채로 시중 자금이 흘러들어 시장 경색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한은은 보고 있다. 한은은 이번 조치로 은행이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고유동성 자산 규모를 최대 29조 원 정도로 추정했다.
장익창 기자
sanbada@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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