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인의 지인이 이직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디로 이직한대?” “응, 스타트업.” “아, 그렇구나.” 뭔가 웃기다는 생각이 든 건 그 직후다. 분명 나는 어느 회사, 그러니까 어느 업종으로 옮기는지를 물은 건데 지인은 ‘스타트업’이라고 답했고, 그를 들은 나 역시 더 묻지 않고 수긍했다는 게. 어느 순간부터 스타트업은 그곳이 무엇을 만드는 회사인지 몰라도 그저 스타트업이란 단어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되는 느낌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처음 사용된 말인 스타트업은 신생 창업기업을 뜻한다. 조금 더 좁히면 첨단기술이나 참신한 아이디어에 기반해 설립하여 고위험, 고수익, 고성장을 목표하는 기업의 ‘형태’를 스타트업으로 통칭한다. 스타트업에는 으레 뒤따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신생 회사인 만큼 CEO를 비롯한 임원진과 직원군의 수평적 조직문화가 강조된다. 영어 이름을 쓰고,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우며, 반바지든 슬리퍼든 상관없는 자유로운 업무 복장,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내놓고 교환할 수 있는 분위기 등등.
‘유니콘’의 맥콤은 이런 이미지를 대놓고 전복한다. 스티브는 새로 채용한 제이(이유진)에게 수평적인 관계를 강조하지만 제이의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압존법을 지키지 않음을 지적한다. 야근 없는 기업 문화를 지향한다지만 퇴근 시간이 지나고 스크럼(소규모 스타트업에서 널리 쓰는 프로젝트 관리 기법)이 일상적으로 진행된다. 대단히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만 우리 K-직장인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풍경 아닌가.
기민하게 변화에 반응하는 것이 스타트업의 강점이라지만 잦아도 너무 잦은 피보팅(Pivoting, 기존 사업 아이템이나 모델을 바탕으로 사업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전환하는 것)도 문제. 기존 사업 아이템이던 데이트 매칭 어플 ‘어게인’이 우연한 오류로 60세 이상 가입자만 받는 것으로 바뀌었다가 폭발적으로 가입자가 늘어나자 단숨에 ‘챠브네’를 버리고 시니어 전용 데이트 어플로 피보팅하는 과정도 웃음의 연발이다.
대기업 총수들도 찾아간다는 점쟁이의 한마디에 회사의 명운을 맡기려는 모습 정도는 가벼운 에피소드. 회사의 모든 정책이 스티브의 들끓는 변덕으로 생겼다 없어지는 것도 웃음 포인트인데, 인사팀 모니카(김영아)의 아이디어로 사내에서 통용되는 화폐 ‘스티브 머니’를 만들었다 없애는 모습, 영화 ‘인턴’을 보고 시니어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나 정작 자신은 기억도 못 하는 모습 등이 기껏 차근차근 단계 밟아온 사업 아이템이 상사의 변덕스러운 한마디로 엎어지거나 전혀 생뚱맞은 아이템으로 변모하는 경험을 갖고 있는 직장인들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스티브만큼은 아니어도 여러모로 은은한 광기를 지닌 맥콤 크루들의 활약도 눈여겨봐야 한다. 인생 한 방을 노리고 유일하게 스톡옵션을 받고 맥콤에 들어온 애슐리(원진아)는 이 회사에서 가장 정상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쌍욕을 참지 못하고 툭하면 경위서를 쓴다.
빅데이터 못지않게 세간의 가십을 누구보다도 빨리 아는 마케팅팀 캐롤(배윤경), 청순한 외모와 뇌를 지닌 마케팅팀 필립(김욱), 스티브가 유일하게 눈치를 보는 개발자 곽성범(이중옥), 트렌드에 죽고 살며 세상의 모든 편견에 훈수를 두는 제시(배유람), 클럽하우스에서 스티브를 만나 채용되었으나 뭔가 비밀을 감추고 있는 제이 등 누구 하나 애정이 안 가는 인물이 없다.
한국에서 시트콤이 인기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순풍산부인과’ ‘하이킥’ 시리즈 등으로 한국 시트콤계의 마에스트로로 불렸던 김병욱 PD는 한국 시트콤과 거의 동의어 같은 존재였고. 그러나 2014년 이후로 한국 시트콤은 거의 사라졌다시피 했다. ‘유니콘’은 이병헌 감독과 공동으로 ‘멜로가 체질’을 연출한 김혜영 PD가 연출을, 작가 겸 코미디언 유병재가 대본을 맡고, ‘극한직업’ ‘멜로가 체질’의 이병헌 감독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나서 한국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툭툭 건드리고 패러디하며 웃음을 안긴다. 2022년의 한국에 무척 잘 어울리는 시트콤으로, 망해가던 K-시트콤의 부활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것 같다. 시즌2를 적극 기다리며, 아직 ‘유니콘’을 보지 못했다면 당장 쿠팡플레이에서 시청하길 권한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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