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종종 부질없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할, 로또가 되면 무엇을 할까 하는 상상. 당첨 금액대에 따른 실수령액 계산으로 시작해 국세청의 눈을 피해(!) 조금이라도 증여세를 덜 부담하고 가족에게 증여하는 방법과 부동산 취득은 어느 정도로 하고 분산 투자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상상, 아니 계산하다 보면 꽤 즐겁다. 물론 이 상상에서 빚은 계산을 주변에 말하면 대부분 핀잔을 준다. 제발, 생산성 있는 일을 좀 해. 그런데 왜? 이 상상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길티 플레저’도 아니다. 하면 안 된다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니까. 아, 이런 상상을 시작으로 삼천포로 빠져 하릴없이 마감이 늦을 때는 있으니 담당자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나의 소소하고도 세속적인 상상에 불을 확 질러버렸다. 어릴 적부터 가난했던 세 자매가 있다. 첫째 오인주(김고은)는 새시 잘된 아파트에서 동생들과 걱정없이 사는 것이 꿈이다. 이들이 얼마나 가난한지는 인주의 어릴 적 회상으로 나온다. 생일날 케이크 하나 먹을 수 없어 엄마가 케이크 대신 삶은 계란을 쪄주었다는 회상. 어른이 되어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전문대를 나온 인주는 오키드 건설 경리로 일하고 있고, 둘째 오인경(남지현)은 방송국 기자가 되었지만 값비싼 사립예고에 다니는 막내 오인혜(박지후)의 생일날 케이크와 함께 수학여행비 250만 원을 선물하는 정도로도 허덕인다. 그 250만 원을 엄마(박지영)가 들고 튀었을 때, 첫째와 둘째는 각각 125만 원이 없어 회사에 가불을 요청하거나 대출을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거액의 돈이 툭, 오인주 앞에 튀어나온다. 오키드 건설에서 인주와 함께 회사 내 왕따로 있는 경리 진화영(추자현)이 모그룹인 원령그룹의 비자금을 횡령해 그 중 일부인 20억 원을 인주에게 남긴 것이다. 정작 자신은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단 사체로 발견되고. 20억 원은 원령그룹의 비자금인지라 경찰에 신고한다 한들 주인을 찾는 게 아니라 국고로 회수된다고 한다. 검은 돈이자 완벽한 눈먼 돈. 이런 상황에서 그 20억 원을 마다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주도 그랬다. 20억 원을 삼키려 했다. 부동산 회사를 운영하는 고모할머니 오혜석(김미숙)에게 부탁해, 20억 원을 돈세탁하고 아파트를 사고자 한다.
문제는 갑자기 사이즈가 커진다는 거다. 진화영이 오인주에게 20억 원을 남겼음을 알아챈 박재상 측에서 돈을 수거해 갔고, 다시 인주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니, 유전성 희귀병을 앓는 인혜의 수술비 1억 원이 필요하니 더 절박해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화영이 빼돌린 돈 700억 원을 오인주의 명의로 싱가포르에 숨겨 놨다. 싱가포르에 가기만 하면 오인주 명의의 집도, 차도, 현금도 있다. 남은 돈을 찾기 위해 인주를 주시하는 박재상 측만 따돌릴 수 있다면, 그 돈을 가지고 영원히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을 만한 거액이다. 마침 원령그룹 해외 법인 본부장이자 그룹의 돈세탁을 담당하고 있는 최도일(위하준)이 그 돈을 오인주와 6:4 비율로 나누는 조건으로 신분세탁을 도와준다고 한다.
20억은 물론 700억 앞에서도 초연한 둘째 인경은 오히려 이 드라마에서 특이해 보일 정도다. 더 많은 것을 탐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지르는 박재상과 그의 아내 원상아(엄지원)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세간의 기준으로 꽤나 넉넉한 처지일 최도일 또한 ‘세상 그 어떤 것도 돈보다 신성하지 않다는 것이 내 도덕률’이라 스스럼없이 말하지 않던가. 박재상이 진화영을 죽인 살인범일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를 마주한 박재상의 딸 효린(전채은)과 그의 친구 인혜가 주고받는 대화는 또 어떻고.
“아버지가 살인자면 기분이 어때?”(인혜)
“안 좋아, 아주.”(효린)
“아버지가 가난한 것보다 더?”(인혜)
“그 정도는 아닌데 경우에 따라 더 나빠질 수도 있을 거 같아. 아버지가 체포당하거나 세상에 이 일이 알려지면.”(효린)
살인자를 둔 아버지보다 가난한 아버지가 더 나쁘게 여겨질 수 있다는 생각이 철없는 10대 학생이라서 나온 말일까? 슬프게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살인사건임을 감지하고도 돈이라는 도덕률을 좇아 신고할 생각이 1도 없는 최도일이나 사람들이 죽는 걸 보면서도 부자가 되기로 선택했던 오혜석이나, 심지어 화영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오인주 역시 돈 많고 못된 부모와 무능한데 착한 부모 중 택해 보라는 인경의 질문에 “무능한데 착한 게 어딨어? 무능한 거 자체가 나쁜 건데”라고 답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6화까지 방영된 ‘작은 아씨들’에서는 숱하게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다. 1화에서 진화영이, 2화에서 화영과 함께 비자금을 횡령하던 오키드건설 이사 신현민(오정세)과 보배저축은행 사건의 진실 한 조각을 쥐고 있는 김달수 행장 조카인 김철성이, 6화에서는 세 자매의 고모할머니 오혜석이 죽었다. 진실을 밝히려다 죽은 김철성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나방처럼 돈을 좇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맹목적으로 돈을 좇다 보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작은 아씨들’은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돈의 그런 속성을 오인경처럼 모두가 외면할 수 있을까 싶다. 원상아가 말하지 않았던가. “걔(진화영)는 그 과정에 취했지. 전능한 느낌이 든 거예요. 돈은 사람을 조금 그렇게 만들어요.” 그렇다. 돈이 사람을 전능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이상, 불나방처럼 돈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주식과 코인을 하고, 미술품과 부동산을 사는 등 끊임없이 무언가 돈이 되는 것에 촉수를 뻗는다. 때로는 도박과 다름없는 선택을 하는 등 무리를 한다. 가난이 무능을 넘어 나쁘고 혐오받는 세상이 될수록 그런 사람들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작은 아씨들’의 세 자매가 남은 6화 분량에서 어떤 길로 나아갈지는 모르겠다. 기본 플롯이 ‘가난하지만 우애 있게 자란 세 자매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맞서는 이야기’인 만큼 ‘흑화’되지는 않겠지. 그런데 그런 생각도 든다. 700억이기에 ‘흑화’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애초의 20억 정도라면, 오인주는 어쩌면 끝까지 가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새시 잘된 작은 아파트 하나 사서 동생들과 도란도란 살 수 있는 구체적인 규모의 돈이니까. 그러나 700억은 좀 다르다. 돈 많은 오혜석이 ‘700억은 너무 큰 돈’이라 할 만큼 위험이 뒤따르는 규모다. ‘오징어 게임’의 기훈이 목숨을 걸고 얻고자 했던 돈이 456억이었는데 말이지.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돈에는 오히려 초연해질 수 있다. 아닌가?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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