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2023년 1월 1일부터 유통기한 대신 소비기한 표시제가 도입된다. 2021년 8월 법안 공포 이후 약 1년 반의 준비 기간을 거쳐 마침내 시행을 앞둔 것. 하지만 소비기한 도입을 코앞에 두고 식품업체와 시민단체 등 관련 주체의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소비기한이란 식품 등에 표시한 보관 방법에 따라 섭취했을 때 안전에 이상이 없는 기한을 뜻한다. 유통기한은 제품의 제조일로부터 소비자에게 유통 및 판매를 허용하는 기한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유통기한은 영업자 중심의 표시제, 소비기한은 소비자 중심의 표시제다.
2021년 8월 17일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의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으로 대체하는 개정 법안이 공포되면서, 우리나라도 소비기한 표시제를 도입하게 됐다. 개정안은 유통기한 도입 당시에 비해 지금은 식품 제조 기술이 발달하고 냉장 유통 체계가 개선됐다는 점에서 국제 추세에 따라 소비기한을 사용한다고 개정 취지를 설명했다. 현재 미국·일본·캐나다·유럽·호주 등 여러 국가가 소비기한을 사용하며,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는 소비자가 유통기한을 식품 폐기 시점으로 오인할 수 있다며 소비기한 사용을 권고하고 있다.
이로써 1985년 국내에 도입된 유통기한 표시제는 약 4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다만 유제품은 냉장 유통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2031년부터 소비기한을 적용한다. 제도 시행 후에는 기존 유통기한과 다르게 소비기한을 새로 설정해야 하며, 영업자(식품업체) 책임하에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으로 설정하거나 표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식약처는 업체의 편의를 위해 소비기한 연구센터의 연구용역을 통해 2022년부터 2025년 사이 200개 식품 유형별로 권장 소비기한을 마련할 계획이다.
정부는 소비기한 도입 이후 식품 폐기물이 감소해 산업체가 얻을 환경·경제적 편익이 연간 260억 원, 10년간 22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본다. 국제적인 추세에 따르는 만큼 식품 수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법 개정 후에도 식품업계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왔다. 지난 7월 식약처의 소비기한 연구센터 개소식에 참석한 주요 식품업체, 한국식품산업협회 측은 “시행일에 맞춰 포장지를 변경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고, 포장지 폐기로 인한 자원 낭비와 비용 부담이 있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도 이를 적극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식약처가 8월 11일 발표한 ‘식의약 규제혁신 100대 과제’에 ‘식품 소비기한 표시제 시행 계도기간 부여’가 포함된 것. 이에 따라 시행일 이전에 원하는 식품업체에 소비기한 선적용을 허용하고, 2023년 1월 1일~12월 31일까지 유통기한이 적힌 포장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계도기간이 주어졌다. 계도기간 중에 유통기한이 쓰인 포장재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행정시스템에서는 소비기한으로 적용된다.
소비기한 도입까지 4개월 남짓 남은 상황이지만 관련 주체들의 목소리는 제각각이다. 선적용, 계도기간 부여에도 식품업체들의 불만은 여전하다. 종합식품업체 A 사 관계자는 “비용과 안전의 부담을 모두 기업에 넘기는 식”이라고 역설했다. 이 관계자는 “최소한 정부가 품목별 소비기한이라도 제공해야 한다. 업체마다 각각 마련하는 게 말이 되나. 연구센터에서 권장 소비기한을 마련한다지만 4년이나 걸리는 반면 시행은 당장 내년이 아닌가. 정부가 주도하고 책임은 기업이 지는 셈”이라며 “정부의 손이 닿지 않는 중소업체나 신선식품 업체에는 더욱 부담일 것이다. 중소업체 중엔 포장재 2~3년 치를 한 번에 구입하는 곳이 많아 계도기간 1년 동안에도 손해를 볼 것”이라고 주장했다.
식품업체마다 준비 현황도 제각각이다. 장류·면류·통조림 등을 생산하는 샘표식품은 “통조림 제품을 시작으로 계도기간 내 전 품목에 소비기한 라벨을 적용할 것”이라고 답했고, 인스턴트커피·시리얼 등을 판매하는 동서식품은 “품목마다 소비기한을 실험하고 있으며 제품별로 소비기한 적용 시기가 상이해 순차적으로 도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부 업체는 대략적인 도입 시기조차 정하지 않은 상태다. 종합식품업체 B 사와 C 사 관계자는 “포장재를 소진하는 대로 교체하겠지만 내년부터 소비기한 도입이 가능할지 알 수 없다. 정부에서도 권장 소비기한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 결과도 지켜봐야 한다”라고 입을 모았다.
판매채널에선 소비기한 도입을 환영하는 분의기다. 전국편의점가맹점협회 관계자는 “진열 기간이 길어지면 점주 입장에서 대환영이다. 지금도 즉석식품 폐기로 인한 낭비가 심각하다. 폐기는 전부 손실”이라며 “식품은 지금보다 다양한 품목을 입고할 수 있을 것이다. 고객도 선택지가 늘어나니 좋지 않을까. 다만 안전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제품 관리에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다”라고 답했다.
시민단체들은 식약처가 계도기간을 부여한 것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소비자기후행동은 “소비기한 표시제가 연착륙하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는 건 예견할 수 있었다. 시행을 앞둔 시점에 식약처가 계도기간을 발표한 건 매우 유감스럽다. 계도기간이 특정 이해 당사자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가 아니길 바란다”라며 “오랫동안 유지해온 제도를 바꾸는 건 쉽지 않다. 최근 1회용품 보증금제를 비롯해 사회적으로 합의한 제도가 암암리에 후퇴하거나 폐기되는 일이 있었다. 1년의 계도기간이 소비기한 표시제의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과정이 되도록 지켜볼 것”이라고 밝혔다.
자원순환연대 측은 “소비기한 도입 논의는 오래 이어졌고 드디어 시행을 앞뒀는데, 계도기간을 부여하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사업자들이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심지영 기자
jyshim@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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