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정부가 도심지 공급 핵심으로 꼽히는 정비사업을 정상화하고자 신탁회사의 정비사업 참여를 독려하기로 했다. 주민들로 구성된 조합이 전문성과 투명성 부족으로 사업을 망치는 일을 개발 전문기관을 투입해 막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관련 업계에서는 성공 사례가 적은 신탁방식 정비사업을 활성화하는 데 의구심을 품고 있다.
#새 정부 ‘국민 주거안정’ 1호 전략, 정비사업 정상화 통한 도심 공급 확대
정부는 16일 국민 삶의 질 개선을 위한 ‘국민 주거안정 실현방안’을 발표하면서 도심지역 공급 확대를 첫 번째 과제로 내세웠다. 도심 공급 핵심인 민간 정비사업을 정상화하고 새로운 개발 모델을 도입해 도심 신축 주택 공급을 확대할 계획이다. 주택시장을 안정화하고 주거환경을 개선하려면 선호도가 높은 도심에 양질의 주택이 충분히 공급돼야 한다는 인식이다.
정비사업 정상화의 핵심은 규제 완화다. 정부는 지난 5년간 줄어들었던 신규 정비구역 지정을 향후 5년간 22만 호까지 끌어올리기로 했다. 2018년부터 올해까지 5년간 새롭게 지정된 정비구역 주택 물량 12만 8000호보다 70% 이상 많은 양이다. 이 밖에 정비사업을 저해하는 재건축부담금은 적정수준으로 완화하고, 재건축 선행 조건인 안전진단에서 허들로 작용했던 구조안전성 비율을 하향 조정, 공공기관 적정성 검토도 필요시에만 시행하도록 바꾼다.
정비사업 정상화 방안에서 주목할 부분은 신탁회사를 통한 정비사업 활성화다. 정부는 주민이 조합을 설립하지 않고 신탁사를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신탁사 활용 시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밝혔다. 사업시행자 지정요건은 완화하고 신탁사가 시행하는 정비사업장은 정비계획과 사업계획을 통합처리 해 사업기간을 3년 이상 단축한다. 주민들로 구성된 조합이 전문성과 투명성 부족으로 정비사업이 망치는 사례를 개발 전문기관 참여로 막겠다는 취지다.
신탁방식 정비사업에서 신탁회사는 토지소유자에게 땅 명의를 위탁받아 정비사업을 추진한다. 직접 시행을 맡는 경우에는 주민들이 꾸린 조합처럼 자금조달과 공사발주, 관리, 운영 등 정비사업 전반을 도맡게 된다. 신탁사가 직접 시행을 맡으면 주민들은 조합을 꾸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조합 설립까지 걸리는 4년가량의 사업 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탁사를 통해 부족한 초기 사업비를 조달할 수도 있다. 서울시의 경우 시공사 선정도 사업시행인가 이후에서 신탁사 시행자 지정 후로 앞당길 수 있다.
#‘성공사례 적고 단점은 여전’ 신탁방식 정비사업 활성화 실효성 의문
하지만 아직까지 신탁방식 정비사업의 성공사례는 드물다. 정부가 전문성을 내세워 신탁사 사업시행을 독려하는 것이 의아한 이유다. 신탁방식 정비사업의 성공사례는 지난해 11월 준공된 304세대 규모 경기 안양시 진흥·로얄아파트(한양수자인평촌리버뷰)와 2020년 11월 준공된 2267세대 규모 대전 동구 용운주공아파트(이편한세상 대전 에코포레)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서울에서는 성공 사례는커녕 착공한 단지도 없다.
현재 우리나라 전체 정비사업에서 신탁사가 사업을 시행하는 곳은 4% 수준. 서울시 주거정비과에 따르면 서울 시내에서는 750개 정비사업장 중 9곳이 신탁방식을 택하고 있다. 각각 사업 시행 단계인 신길10구역, 조합 설립 단계인 여의도시범아파트, 불광1구역, 신길우성2차·우창아파트, 정비구역 지정 단계인 돈의문2구역, 신반포궁전아파트, 조합설립추진위원회 단계인 여의도수정아파트, 여의도대교아파트, 여의도한양아파트 등이다.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정비사업 사업시행자로 나선 신탁사들이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 피하게 해주겠다고 하는 등 주민들에게 약속했던 사항들을 이행하지 못하면서 신탁사의 정비사업 전문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민들이 늘고 있다. 건설사 입장에서는 조합 자금대여나 신용공여를 신경 쓰지 않아 좋지만, 신탁사에 막대한 업무 수수료를 지급하기에는 정비사업 추진에 대한 성과나 기대가 적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높은 수수료와 주민 의사가 배제되는 단점은 여전하다. 신탁방식 정비사업에서 신탁사는 업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총 분양대금 2~4%, 단지별로 수십억 원에서 수백억 원에 달하는 수수료를 받는다. 사업 의사결정 권한이 신탁사에 있어 주민 의견도 반영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정부는 이번 주거안정 실현방안에서 주민 해지권한과 신탁 종료시점, 주민 시공자 선정권 등 토지주 권익보호 문항을 담은 표준계약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지만 사인 간 계약 내용까지 강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신탁 업무 수수료에 대한 언급은 애초에 없다.
김예림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는 “신탁방식 재건축이 그간 잘 활용되지 않았던 이유는 비싼 수수료와 주민 의사가 배제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신탁사를 사업시행자로 선택하는 사업장이 획기적으로 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조합방식과 신탁방식 인센티브 차이가 불명확할뿐더러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의 정비사업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이런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의문이다. 조합방식의 정비사업에서도 전문가 집단을 구성하게끔 독려해 전문성을 보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도 “신탁회사도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영리기업이기 때문에 재산권을 행사하는 정비사업지 주민들과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언제든 있다. 신탁사가 개인보다는 전문성이 있지만 도급계약 당사자인 시공사에 견줬을 때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라며 “오히려 정비사업을 한 번 수행하는 조합보다 여러 번 수행하는 신탁사는 건설사와 유착해 비리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차형조 기자
cha6919@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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