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격세지감(隔世之感). 웨이브 오리지널 예능 ‘메리 퀴어’와 ‘남의 연애’를 보면서 생각나는 말이다. 드라마 주요 인물로 동성애자가 등장한다며 모 단체에서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가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가 책임져라!”라는 제목의 광고를 일간지에 게재했던 것이 2010년의 일이다. 그보다 10년 전인 2000년, 연예인 홍석천은 커밍아웃한 뒤 모든 방송에서 하차해야만 했다. 그 과정을 생생히 지켜봤던 사람으로선, 세상을 향해 커밍아웃한 일반인의 모습을 담은 예능 ‘메리 퀴어’와 ‘남의 연애’의 등장이 놀랍기만 하다.
‘메리 퀴어’는 ‘국내 최초 리얼 커밍아웃 로맨스 프로그램’이란 취지로 남(男)-남(男), 여(女)-여(女), 그리고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양성애자 여성 커플 등 성소수자 커플의 연애와 결혼관을 보여준다. 방송인 신동엽과 홍석천, 하니가 MC를 맡아 세 커플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관찰 예능이다.
‘남의 연애’는 ‘국내 최초 남자들의 연애 리얼리티’를 표방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이 ‘남의 집’이라 명명된 숙소에서 일정 기간 합숙하는 형식으로, 남성 동성애자 버전의 ‘하트시그널’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1화에서 여섯 명의 출연자가 등장했고, 4화까지 두 명이 더 추가된 상태다. 두 프로그램 모두 익숙한 기존 예능의 포맷을 취했다. 남남 또는 여여 커플 출연자의 달달한 애정 표현에, 회차 초반 ‘동공 지진’이 오던 시청자도 금세 적응하게 된다.
‘메리 퀴어’와 ‘남의 연애’는 동일한 OTT 플랫폼에서 비슷한 시기에 방송을 시작한 일반인 성소수자가 출연하는 예능이란 공통점이 있지만 방송의 초점은 각기 다르다. ‘메리 퀴어’는 집들이를 준비하고, 파트너와 함께 부모를 만나러 가는 등 커플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남들이 다르다고 하는 이들의 삶도 알고 보면 ‘다름’보다 ‘닮음’이 더 많음을 들려주려 한다. 분명 다른 부분이 있지만 그만큼 닮은 부분이 많고, 보면 볼수록 다양한 형태의 성소수자와 그 커플이 우리 사회의 일원임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달까.
그런 의미에서 1화에서 MC를 맡은 홍석천이 하니에게 “주변에 혹시 그런(퀴어) 친구들이 좀 있어?”라고 가볍게 던진 질문을 눈여겨봐야 한다. 하니가 “아니요, 사실 제 주변에는 없어요”라고 말하자 농담처럼 받아치는 홍석천의 말이 백미. “눈치가 없구나. 분명히 있었을 텐데.” 놀란 듯 웃는 하니의 모습 아래 자막으로 ‘뒤늦은 깨달음’이란 문구가 삽입되는데, 순간 나도 움찔했다. 그렇네, 내 주변에도 있을 수 있는데 없다고만 생각했구나!
‘메리 퀴어’는 우리 주변에 분명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았던 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시도 자체로 유의미하다. 누군가가 좋든 싫든 간에 엄연히 그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수영장 탈의실을 이용하고, 결혼 준비를 위해 웨딩 플래너를 구하고, 혼인신고를 하는 등 누군가에게는 손쉬운 일이 누군가에게는 난관이라는 걸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이 같은 시선과 내용에 어울리게 프로그램의 톤 또한 예능과 다큐 사이 중간쯤의 분위기다. 자극적인 편집이나 화제 몰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남의 연애’는 ‘메리 퀴어’보다 가볍게(?) 접근할 수 있다. 남성 출연진으로만 채워진 ‘남의 집’에서 출연자들은 여느 이성애자들의 연애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과 다를 것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마음 가는 대로 연인 찾기에 집중한다. 입주 첫날에는 나이와 직업 등 신상을 밝힐 수 없어 외모 등 끌리는 느낌으로만 호감을 표하고, 누가 누구에게 호감을 표하는지에 따라 남심(男心)이 요동친다.
남자가 남자에게 이끌리는 사실 자체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면, ‘남의 연애’는 흔하게 보는 연애 리얼리티 예능과 별다를 바 없어 재미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연자들의 ‘훈훈한 비주얼’도 한 몫 하거니와, 실제 커플이 출연해 애정 표현이 자연스럽게 나왔던 ‘메리 퀴어’와 달리 썸타기 직전의 탐색전과 풋풋한 감정들로 채워져 있기에 이성애자의 연애에 익숙한 이들도 편안하게 볼 수 있다. 자연스럽게 ‘성소수자는 성적으로 문란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는 점도 돋보인다.
왓챠의 오리지널 시리즈 ‘시맨틱 에러’의 인기 이후 BL(Boys Love) 콘텐츠를 다룬 작품을 OTT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청춘 로맨스 사극 ‘춘정지란’(왓챠), 한류스타와 셰프의 동거 로맨스 ‘나의 별에게’(티빙) 등 BL 드라마가 인기를 얻었고, 이후에도 ‘신입사원’ ‘비의도적 연애담’ ‘오 나의 어시님’ 등의 작품이 줄지어 만들어지고 있는 실정.
BL 콘텐츠의 제작 러시는 그만큼 사회가 달라지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지만, OTT라는 다소 진입장벽이 있는 플랫폼에서만 반짝인기에 그치는 걸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일반인이 출연한 예능 ‘메리 퀴어’와 ‘남의 연애’의 등장은 성소수자를 대하는 대중의 인식의 저변을 넓히는데 톡톡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다.
2019년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배타미(임수정)는 회사 후배에게 애인이란 단어를 썼다가 ‘요샌 다들 여친이라 그런다’며 올드하다는 핀잔을 듣는다. 그때 배타미는 이렇게 말한다. “그쪽이 게이일지 바이일지 스트레이트일지 몰라서 배려한 건데.” ‘시맨틱 에러’가 인기를 끌고 ‘메리 퀴어’와 ‘남의 연애’ 같은 프로그램이 등장한 지금, 앞으로는 배타미의 말처럼 ‘여친’ ‘남친’ 대신 ‘애인’이나 ‘연인’이란 말이 더 많이 쓰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성소수자의 존재가 불편한 이들이라도 이 점만은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 변화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순 있어도 세상을 거꾸로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 그러고 보니, 난 두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들의 애정 표현보다는 화장붓까지 자유롭게 쓰는 남성들의 메이크업 실력과 방송에서 붕대 감지 않고 드러낸 화려한 문신에 더 놀란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꼰대구나, 나.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처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 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정수진의 계정공유]
궁금증이 계속 치솟는 독특한 드라마 '환혼'
· [정수진의 계정공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당연하지만 귀한 보편적 가치들
· [정수진의 계정공유]
뭐지, 이 신박한 '돌아이' 청춘물은? '최종병기 앨리스'
· [정수진의 계정공유]
부자가 되기 위해 어디까지 가능해? '클리닝 업'
· [정수진의 계정공유]
'우리의 아버지', 나도 모르는 이복형제가 100명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