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비대면·무인화 바람이 거세다. 유통가든 금융가든 직원이 있던 자리에 이제는 인공지능(AI) 상담원과 키오스크가 들어선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아직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기엔 역부족인데도 비용 절감과 운영 효율화를 내세워 무인 매장을 늘리는 업체가 많다. 그 속에서 사람이 필요한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소외된다.
#은행마다 기기 같아도 화면 제각각, 상담 연결도 찾기 어려워
지난 13일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는 국회를 찾아 2023년 1월 시행하는 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안 시행령 개정을 촉구했다. 법안에는 키오스크 접근성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는데, 업체에 따라 3년 이상 유예할 수 있어 장애인 단체의 반발을 샀다. 기준을 지나치게 자세하게 설정해 실효성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였다. 연대 측은 11일 서울시청 인근의 패스트푸드점을 찾아 시각장애인이 주문용 키오스크를 쓰기 어렵다는 점을 알리는 데도 나섰다.
직원 대신 키오스크를 두는 건 유통업계만의 일이 아니다. 금융권에서도 일반 점포를 줄이고 스마트 점포나 디지털 점포라는 이름으로 소형·무인 점포를 늘리고 있다. 이곳에는 카운터 대신 ATM·STM(스마트텔레머신)이 들어섰다. AI 행원이 고객을 맞거나 화상 상담이란 이름으로 카메라 너머에서 직원이 나타난다. 현재 4대 은행(KB국민·신한·우리·하나) 모두 이 같은 형태의 디지털 점포를 연 상태다.
일반적으로 ATM에는 점자 표시, 음성 안내를 위한 이어폰꽂이, 직원을 호출할 수 있는 수화기, 숫자 버튼 등이 장착돼 있다. 유통가 키오스크에 비하면 장애인 고객을 위한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그렇다면 지난 2~3년 사이 부쩍 늘어난 STM이나 화상 상담 기기는 어떨까. 21일 서울에 있는 4대 은행의 디지털 점포를 직접 찾아 살펴봤다.
방문한 점포는 신한은행 GS 더프레시 광진하양점, 하나은행 CU 마천파크점, 우리은행 디지털 EXPRESS 구일점, KB국민은행 NB 강남터미널점이다. 4곳 모두 국내 ATM 업체인 효성에서 만든 STM을 도입했다. 그래서인지 기기의 형태나 기능은 네 곳 모두 큰 차이가 없었다. STM에도 ATM에 있는 점자, 상담용 수화기, 숫자 버튼 등이 갖춰져 있었다. 언뜻 보기엔 사용에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네 점포 중 우리은행 구일점을 제외한 세 곳에선 직원을 볼 수 없었다. 안내 데스크가 있지만 직원이 상주하는 건 아닌 듯했다. 우리은행의 경우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직원 2명이 고객을 응대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STM이 있든 화상 상담 기기가 있든, 장애에 따라서는 사람이 없는 점포를 이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시각장애인 강 아무개 씨에게 은행 무인점포나 STM 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그는 “스마트 기기는 혼자 못 쓴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라며 “시각장애인에게 가장 필요한 건 인력 서비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강 씨는 “ATM은 어느 정도 표준화돼 있어 은행이 달라도 쓸 수 있다. 이어폰을 꽂으면 음성 안내도 나온다. 하지만 STM은 은행마다 같지 않아서 학습하기 어렵다. AI 행원을 둔다면 모든 업무를 음성으로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화해야 그나마 쓸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실제로 은행 모두 STM에서 직원 호출을 할 수 있었지만 별도의 버튼이 없어 시각장애인에겐 접근성이 낮아 보였다. 또 강 씨 말처럼 화면 구성이 은행마다 제각각이어서, 음성 안내를 받더라도 금방 익숙해지기는 어려워 보였다.
심지어 화상 상담 기기에 화면, 마이크, 펜, 이어폰 단자 외엔 아무것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ATM·STM과 달리 입출금, 통장정리처럼 현금 발생·서류 필요 업무는 처리하지 않는 것이다. 이 기기를 이용하려면 상담원과 연결해야 하는데, 상담 시작 버튼이 터치 화면 하단에 별도로 있어 시각장애가 있다면 이를 찾아 연결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문제점은 또 있다. 안내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누군가는 은행 업무는커녕 번호표도 뽑지 못한다는 뜻이다. 심정섭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 실장은 “최근 들어 은행에서 신형 키오스크로 번호표를 주는 곳이 많아 시각장애인은 접근이 더 어려워졌다. 번호표조차 혼자서 받을 수 없는 셈이다”라고 답했다.
심 실장은 “금융 서비스는 활동 지원가도 도와주기 어렵다. 자칫 금전적인 문제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행원이 서류를 대필할 수 없어 심지어 청원 경찰에게 부탁한 사례도 있다. 사람이 있어도 원활한 금융서비스가 어려운데, 점포를 줄이고 무인점포를 늘리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주식은 MTS 대신 ARS로 거래, 본인인증은 타인의 도움 받아야
은행이 오프라인 점포를 줄이는 배경 중에는 인터넷·모바일 뱅킹 등 비대면 거래의 활성화도 있다. 은행뿐만 아니라 증권업계도 이 수혜를 톡톡히 입었다.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폭발적으로 늘어난 증권사 신규 고객은 대부분 앱을 통한 가입자다. 증권사 비대면 계좌개설 건수는 2017년 1929건에서 지난해 상반기에만 2만 248건으로 폭증했다. 그만큼 모바일 트레이딩 시스템(MTS)을 이용하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점포를 방문하기 힘든 시각장애인은 인터넷·모바일 등을 통한 비대면 금융 거래는 어떻게 할까.
중증 시각장애인 조 아무개 씨는 “은행 업무를 볼 때는 앱보다 웹(PC)을 주로 사용한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를 묻자 “스마트폰 앱에서는 보안 키패드를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며 “웹에서 음성 인식이 좀 더 원활하게 작동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조 씨는 “스마트폰으로 앱을 이용할 때는 보이스오버(스크린 리더)를 이용해 화면을 ‘읽는다’. 이때 은행 앱은 잘 안 읽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금융 업무를 볼 때 단계에 따라 넘어가야 하는데 무슨 버튼인지 보이스오버가 인식하지 못해 아무거나 눌러봐야 한다. 특히 업데이트라도 하면 음성 기능이 누락되는 경우가 많아 불편하다”라고 설명했다. 혼자서는 앱으로 신분증 본인 인증을 할 수 없어 신규 거래를 할 때는 반드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장벽 중 하나다.
주식 투자를 하는 시각장애인은 앱 대신 ARS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강 씨는 “증권사 MTS는 음성 인식이 안 되거나 공인인증서 로그인에서 문제가 생기는 등 접근성이 떨어진다. 증권사를 방문해서 시각장애인임을 인증하면 앱과 동일한 수수료로 ARS 거래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앱을 쓰는 것보다 그쪽이 더 수월하다”라고 설명했다.
인터뷰에 응한 장애인들은 비대면·무인화 물결 속에 장애인의 금융 서비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심 실장은 “음성으로 비밀번호를 읽어주는 보이스 OTP의 경우 발급은 어려운데 쉽게 망가진다. 제작 업체가 딱 한 곳 있는데, 수익성이 떨어져 개발과 제작이 어렵다고 한다. 행정안전부에서 개선한다고 했지만 아직도 달라진 게 없다”라고 지적했다.
스마트 기기나 앱 교육을 위한 인프라가 열악하다는 점도 문제다. 강 씨는 “스마트폰이나 보조기기를 가르쳐주는 복지관이 서울에만 5개에 그치고, 그 외 지역에는 1개에 그치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며 “강사 구인난도 심각하다. 워낙 박봉이라 젊은 강사들이 기피한다고 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심지영 기자
jyshim@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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