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기업들은 때론 돈만 가지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결정을 한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법이나 제도를 알면 더욱 자세한 내막을 이해할 수 있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비즈니스 법률’은 비즈니스 흐름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를 소개한다.
과거 회사에서는 주로 유형물·출력물의 형태로 문서를 만들고 보관해왔다. 회사의 주요 의사결정은 문서가 출력-회람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의사결정이 내려진 이후엔 해당 문서를 캐비닛 등에 보관했다. 실무자가 수행한 업무 내용 역시 대부분 업무일지나 수첩에 기록했으므로, 업무일지만 보면 특정 일자의 업무처리를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압수·수색이나 행정조사의 대상도 유형물로서의 문서였고, 언론보도에서 수사관이나 조사관이 압수·수색이나 조사를 마친 후 커다란 박스에 문서를 담아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중요한 문서는 전자적 형태로 내부 전산망 등에 저장한다. 전자문서를 출력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문서를 제대로 작성했는지 확인하기 위한 목적에 불과하기에 잠깐 읽고 폐기한다. 그래서 요즘 현장 조사를 마치고 박스에 서류를 담아오는 모습은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깝다. 정작 중요한 문서는 USB에 저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자문서에 관한 행정조사는 어떤 방식으로, 어느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할까? 특히 피조사자의 협조를 전제로 하는 행정기관의 현장 조사에서 회사 내부 전산망을 열람하는 경우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수원지법 2008. 12. 31.자 2008609 결정은 회사 임직원이 공정위 조사관의 내부 전산망 열람 요구에 협조하지 않은 것이 조사방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바 있다.
사안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공정위 조사관은 A 회사의 하도급법 위반 여부에 관해 현장 조사를 하면서 내부 전산망 열람을 요구했다. A 회사 임직원이 회사 기밀 및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이를 거부하자, 공정위는 조사방해를 이유로 하도급법상의 조항을 적용해 과태료 2000만 원을 부과했다.
그러나 수원지법은 공정위 조사관이 내부 전산망의 열람을 요구한 것이 관계 법령에서 규정하는 적법한 직무 집행행위의 범위 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A 회사 임직원이 열람 요청을 거부한 것은 정당하다고 보고 공정위의 과태료 부과 처분을 취소했다. 수원지법이 공정위 조사관의 내부 전산망 열람 요구를 적법한 직무 집행행위의 범위 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조사관이 요구한 내부 통신망 전체를 대상으로 한 열람은 법에서 예정하고 있는 전산 자료의 조사나 자료의 제출 요구라기보다는, 영장의 대상인 수색에 더 가까운 행위다.
② 조사관이 부당한 단가 결정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서류를 내부 전산망을 통해 전달하거나 보관하고 있다는 의심을 가졌다면, 전산 자료 제출을 요구해 이를 조사할 수 있다. 스스로 그 서류 등을 찾기 위해 내부 전산망에 대한 접근권한을 얻어 제한 없이 이를 열람할 권한까지는 부여하지 않는다고 해석함이 상당하다.
③내부 전산망에 대한 제한 없는 열람권을 부여하면 A 회사의 영업비밀이나 직원의 개인정보가 외부로 노출될 우려도 있다.
일반적으로 공정위의 현장 조사가 개시되면, 공정위 조사관은 회사의 전산 담당자를 호출해 사내 전산망의 존재 여부, 접속 방식 등을 확인한 후 부서를 가리지 않고 모든 문서를 열람할 수 있는 이른바 ‘마스터 아이디’를 요구해왔다. 이에 조사권한의 범위에 대한 법률적 판단이 어려운 전산 담당자가 마스터 아이디를 전달하는 사례가 있었고, 그동안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수원지법이 공정위 조사관의 내부 전산망 열람이 적법한 직무집행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니 당연히 그 파장이 적지 않았다. 그 후 수원지법(원심) 결정에 대한 재항고심에서 대법원은 2014. 10. 30.자 2010마1362 결정으로 원심의 결정은 적법하다고 보고 과태료 취소를 유지했다.
즉 법원은 “공정위 조사관이 법 위반의 단서가 되는 서류가 회사의 내부 전산망에서 전달·보관되고 있다고 의심하는 경우 그 서류나 전산 자료에 대한 제출을 요구해 조사하는 건 별론으로 하더라도, 서류 등을 찾기 위해 내부 전산망의 접근권한을 얻어 제한 없이 이를 열람할 권한까지는 부여받지 않았다”라고 보았다. 또한 “내부 전산망에 대한 제한 없는 열람권을 부여할 경우 회사의 영업비밀이나 관련 직원의 개인정보 등이 외부로 노출될 우려가 있어, 이를 법이 정한 조사의 원칙인 필요 최소한의 범위 안에서의 조사라고 볼 수도 없다”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제한 없는 내부 전산망 열람은 위법하다’고 판단한 법원의 결정이 확정됐지만, 현장에서 실무 조사의 모습은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법원의 결정에 따르면 조사 범위가 한정되는 사유로 영업비밀과 개인정보 등이 있지만 관련 법령이 정한 영업비밀, 개인정보의 의미는 지나치게 넓다. 그래서 영업비밀, 개인정보만으로 조사에 이의를 제기하기가 어렵다.
부정경쟁법상 영업비밀이란 ‘공연히 알려지지 않고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서 상당한 노력으로 비밀로 유지된 생산방법, 판매 방법, 그밖에 영업활동에 유용한 기술상 또는 경영상의 정보’를 말한다. 개인정보 보호법상 개인정보에는 이름, 주민등록번호 등은 물론 해당 정보만으로는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없지만 다른 정보와 결합하면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도 포함된다. 이처럼 영업비밀이나 개인정보는 매우 넓은 의미를 갖고 있어 막연히 이를 보호하겠다며 조사에 이의를 제기하면, 조사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오해받아 조사 방해로 간주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조사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해당 자료를 영업비밀이나 개인정보로서 보호해야 하는 사유를 구체적으로 소명해야 하고, 이를 위해 조사 대상이 되는 혐의사실을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피조사자가 조사 초기에 대상 문서의 내용과 혐의사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의제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조사방해를 이유로 제재를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의제기가 향후 진행될 조사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다는 우려가 커서다.
이 같은 현실적인 이유로 내부 전산망 열람을 거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안을 가리지 않고 열람을 거부하는 태도가 피조사자에게 꼭 유리한 것도 아니다. 결국 법원의 결정을 통해 조사 범위의 한계를 숙지했다가, 사안의 내용과 현장의 특성을 고려해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정양훈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알쓸비법] 재벌에 대한 공정위와 법원의 판단은 왜 엇갈릴까
·
[알쓸비법] '불법을 위한 기업' 위장계열사란 무엇인가
·
[알쓸비법] 회사 문 닫을 각오로 해야하는 경제 범죄 '담합'
·
[알쓸비법] 대놓고 베낀 '카피 제품'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
[알쓸비법] 차별화를 위한 광고가 넘지 말아야 할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