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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의 계정공유] '우리의 아버지', 나도 모르는 이복형제가 100명 있다면?

신이 되고 싶었던 의사의 만행 실화…자극적 소재를 담담하게 풀어낸 다큐멘터리

2022.06.20(Mon) 14:24:18

[비즈한국] 동생이 넷 있는 첫째 입장에서 말하자면 형제자매란 시시때때로 골치 아픈데 결정적 순간엔 도움이 되는, 종잡을 수 없는 존재다. 나이가 들수록 형제자매의 가치가 빛난다는 사람도 있고, 나이가 들면서 아예 교류가 단절되다시피 하는 형제자매도 있다. 어쨌거나 이미 네 명의 동생을 가진 터라 ‘외동이었으면’ 하는 어릴 적 바람은 있었으나 형제자매가 더 많기를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만약 나도 모르는 이복형제가 더 있다면 어떨까? 그것도 한두 명 수준이 아니라 수십 명이 넘는다면?
 

처음 제목만 보면 종교 이야기인가 싶다. 물론 ‘우리의 아버지’의 도널드 클라인 박사가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에는 잘못된 종교의 기운이 넘실거리긴 한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유전자를 복제하는 것도 아니고, 왕비와 수많은 후궁을 거느린 왕조시대 왕도 아닌데 이복형제가 수십 명이 넘을 수 있을까 싶지만 있다. 2017년, 미국 의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불임전문의로 명망 높았던 도널드 클라인 박사가 불임 환자들에게 자신의 정자를 몰래 사용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까지 클라인 박사는 자신의 불임 환자들에게 다른 기증자의 것이라 속이고 자신의 정자를 몰래 주입, 인공수정 시술을 했다. 이 사실은 클라인 박사의 생물학적 자녀 중 한 명인 자코바 발라드에 의해 알려졌다.

 

자신이 정자 기증을 통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자코바는 통상적으로 같은 정자를 3번까지 이용한다는 점에 비추어 자신의 이복형제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외동이었던 자코바는 유대감을 나눌 이복형제를 찾길 원했고, 2014년 상장한 유전정보분석업체 23앤드미(23andMe)의 광고를 보고 유전자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나온 결과는 자신과 피를 나눈 이복형제가 일곱 명이 더 있다는 사실. 기증자의 정자를 3번 초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자코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사를 시작했고, 결국 충격적인 진실에 다다른다.

 

불임 환자들에게 거짓으로 자신의 정자를 주입시켜 아이를 낳게 한 도널드 클라인 박사. 세상에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그는 자신의 잘못이 없다는 양 떳떳하게 군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우리의 아버지’는 가장 처음 문제를 인식했던 자코바가 조사를 시작하면서 형제자매(sibling)의 넘버를 계속해서 카운팅한다. 자신들과 혈족 관계에 있던 사람을 통해 불임전문의였던 도널드 클라인이 생물학적 아버지란 사실을 알아내고, 인디애나 검찰청에 그를 고발 접수하고, 언론 이곳저곳에 제보도 하지만 ‘폭스59’의 기자 안젤라 가노트를 제외하곤 누구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 DNA 검사를 받게 된 클라인 박사는 자코바를 비롯한 형제자매를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그는 불임이었던 형제자매의 어머니들이 간절히 아이를 원해 도움을 주었을 뿐이며, 자신의 정자로 태어난 형제자매가 15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다. 그러나, 숫자는 이후 계속 늘어만 간다.

 

끔찍한 사실은 정자 기증을 통한 불임 시술 외에 친부의 정자를 이용해 인공수정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한 형제자매들도 있었다는 것. 불임 환자의 남편의 정액 대신, 의도적으로 자신의 정자를 환자들의 몸에 넣은 거다. 친부모의 친자녀라 생각했던 한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경험을 겪는 형제자매가 늘어갔다. 당연히 남편의 정자를 주입받는 것이라 생각했던 불임 환자들은 수십 년 만에 자신이 유사 강간과 다름없는 행위를 겪었음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교회의 장로로도 활동하며 지역에서 명성이 높은 클라인 박사. 그의 생물학적 자녀들은 그가 장로로 있는 교회가 최대한 많은 아이를 낳게 하는 교리로 유명한 퀴버풀이라는 사이비 종교의 일부일 것이라 추측한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우리의 아버지’에서 이런 끔찍한 일을 오랜 시간 지속한 클라인 박사는, 지역의 존경받는 의사이자 교회 장로였다. 그의 생물학적 자녀들이 검찰에 조사를 의뢰했음에도, 인디애나 주 법상 불임전문의가 자신의 정자를 인공수정 시술에 사용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단 이유로(!) 클라인 박사는 생물학적 자녀들이 접수한 고소로 검찰 조사를 받다가 사실을 부인하고 거짓 진술을 한 혐의로만 기소된다. 결과는? 판사는 클라인 박사가 80세를 앞둔 고령(2017년 재판 당시)이며 과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는 이유 등을 들며 벌금 500달러와 1년의 집행유예를 내린다.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환자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고의로 자신의 정자를 이용해 수십 명의 생물학적 자녀를 같은 지역에 만들어내고, 몇몇은 친부의 정자를 가로채고 자신의 정자를 이용하여 수십 년의 삶을 무너뜨린 죄는 법 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벌을 받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를 제작하는 시점까지 클라인 박사의 생물학적 자녀는 94명까지 확인되었다. 그 수가 얼마나 더 늘어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외동으로 자라 형제자매의 유대감을 얻고 싶었던 자코바 발라드에 의해 클라인 박사의 만행이 밝혀진다. 자신의 이복형제가 일곱 명에서 열 명으로, 십수 명에서 수십 명으로 늘어날 때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차마 짐작할 수 없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다큐멘터리는 대체 클라인 박사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도 유추한다. 클라인 박사가 즐겨 인용하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다’라는 성경 예레미야 1장 5절에 비추어, 그가 ‘자식을 화살처럼 다발로 가득 만들어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교리의 사이비 교단 퀴버풀에 심취해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금발의 푸른 눈을 지닌 백인을 늘리고자 한 인종차별에 입각한 행위일 수도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가정용 DNA 검사 덕분에 클라인 박사처럼 자신의 정자를 주입한 의사 44명을 추가로 발견했다는 다큐멘터리 말미 내레이션을 보면, 아마도 클라인 박사를 비롯한 그들은 일종의 신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과연 우리의 신이 클라인 박사와 다른 의사들을 용서할지는 의문이지만.

 

클라인 박사의 정자로 태어난 생물학적 자녀는 다큐멘터리 제작 시점에만 94명에 달하고, 이후 얼마나 늘어날지 모르는 상태다. 자녀들은 물론, 그저 아이를 원했을 뿐인 자녀들의 어머니들 등 가족들이 겪었을 스트레스와 고통은 어마어마했으리라. 사진=넷플릭스 제공

  

‘우리의 아버지’는 연출이나 전개 방식은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으려 노력한 편이다. 물론 이 다큐멘터리가 소개하는 실화 자체가 워낙 끔찍한 지라 자극을 가미하지 않아도 충분한 때문이기도 하다. 같은 지역 내에서 지나치는 생면부지의 타인이 나와 유전자를 나눈 이복형제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며 살아야 하는 끔찍함, 이제껏 아버지라 여겨온 사람의 자식이 아님이 판명되어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시간, 클라인으로부터 유전된 것으로 보이는 자가면역질환을 앓으며 사는 삶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제발 이런 끔찍한 현실은 픽션으로만 남길 바라며.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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