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결혼적령기’라 불리던 나이를 지나던 때, 주변에서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는 잡음들을 심심찮게 목격하곤 했다. 잡음의 대부분 발단은 ‘돈’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문제는 ‘자존심’으로 귀결되곤 했다. 특히 집안끼리 자존심 대결로 가면 최악인데, 이는 파혼으로 가는 지름길과도 같더라고. 게다가 결혼 준비 과정에서 들어오는 주변의 훈수는 또 어찌나 차고 넘치는지. 그만큼 남의 결혼 준비 과정이 입을 대기 좋은 아이템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결혼 준비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는 드라마는 얼마나 재미질까. 카카오TV에서 방영을 시작한 ‘결혼백서’는 내 일이면 머리를 쥐어뜯겠지만 남의 일이라면 가볍게 입을 털게 되는 결혼 준비 과정을 그려내는 드라마다.
서준형(이진욱)과 김나은(이연희)는 사귄 지 2년 된 알콩달콩한 커플로, 이제 막 결혼을 결심한 상태다. 1화에서 공원에서 마주친 노부부, 가까운 지인의 결혼식을 보며 준형과의 결혼을 꿈꾸게 된 나은은 준형에게 결혼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하지만 결혼과 이혼을 경험한 회사 선배 최희선(황승언)이 ‘결혼은 남자의 의지가 있어야 진행이 되는 것’이라며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말기를 조언하자 갸우뚱한다. 고정관념 어린 말이지만, 또 그만큼 고정관념을 깨기 어려운 것이 결혼이란 것.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이상하리만큼 그 주제를 피하는 준형에게 나은은 적잖이 놀라고 실망하게 된다. 물론 이는 프러포즈를 준비했던 준형의 연기 때문이었음이 밝혀지며 오해는 불식되지만, 시작부터 ‘결혼백서’는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녀는 물론이요 남녀의 집안까지 얽히며 얼마나 많은 오해가 생길 수 있는지, 얼마나 크고 작은 불협화음을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결혼의 첫 관문(?)인 양가 상견례부터 결혼 준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불거지는 예산과 경제권, 호텔과 컨벤션 홀 사이 고민되는 결혼식장, 함과 예단의 스케일 등 8화까지 방영된 내용의 주된 문제를 보면 결국 ‘돈’과 ‘자존심’으로 압축되는 걸 알 수 있다. 좋은 대학 나오고 공기업에 다니는 준형은 대기업 임원 아버지를 두어 풍족하게 자란 상태이고, 나은은 대기업에 다니는 똑부러지는 모범생 스타일이지만 공인중개사사무소를 운영하는 부모님과 함께 복도식 아파트에 거주하는 평범한 가정 출신이다. 그렇지 않아도 결혼 준비가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닌 현실에서 남녀의 가정 경제상황의 갭차이는 불협화음의 시작이 되기 마련이다. 거기에 2년이나 사귄 준형과 나은은 서로의 자산상황을 1도 오픈하지 않았으니 더욱 헤쳐 나갈 일이 많을 수밖에.
특히 관건은 준형과 나은의 경제관념의 차이다. 회사생활 8년 만에 예적금 중심으로 2억을 넘게 모은 나은과 한 달 카드값만 3천만 원을 넘게 쓴 준형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가 있을지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도 쫄깃쫄깃하다(아니, 저 갭을 어떻게 메워?). 1% 남자친구로 꼽히는 준형이지만 경제관념을 보면 하위 1% 남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하다고.
이진욱의 부드러움을 무척 아끼지만,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에서 가장 좋아하는 요소는 준형과 나은의 부모들을 연기한 중년 배우들이다. 나은의 엄마 달영으로 나오는 김미경의 능수능란한 연기야 말할 것도 없고, 준형의 엄마 미숙으로 분한 윤유선은 미워할 수 없는 사모님 역할에 찰떡이며, 대기업 임원이 잘 어울리는 준형의 아빠 종수를 연기한 길용우도 반갑다. 가장 인상적인 건 나은의 아빠 수찬 역의 임하룡. 관록의 코미디언인 임하룡이 연기 잘하는 거야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해학과 풍자로 ‘허허실실’을 잘 드러내는 아빠를 너무나 훌륭하게 연기하는 걸 보고 있다 보면 훨씬 자주 대중매체에서 쓰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시구’ ‘사인미스’ ‘기습번트’ ‘외야뜬공’ ‘구원투수’ ‘빈볼’ ‘실책’ ‘병살타’ 등 매 화 제목에 야구 용어를 붙여 결혼 준비 과정을 보여주지만 굳이 야구와 비교하지 않아도 이 결혼 준비 과정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친숙해서 짜증이 날 때도 있다. 물론 결혼까지 이르는 과정을 최대한 적나라하게 그리며 매 순간마다 ‘고구마’를 안겼던 2012년 드라마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에 비해 1편당 30분 남짓한 길이의 12부작 드라마인 ‘결혼백서’는 한결 순한 맛이다. 자칫 조마조마했던 상견례도 무사히 넘어갔고, 결혼 예산과 경제권 문제로 남들의 조언에 휘말리던 준형과 나은의 신경전도 곧바로 해결됐고, 결혼식장을 정하는 문제도 그 회차 안에 매듭이 지어진다. 물론 7, 8화 들어서 예단과 가구 고르는 문제로 제법 큰 마찰이 있었고 9화에는 대망의 집 고르는 문제가 기다리고 있지만, 어쨌든 매운 맛, 마라맛의 과장되고 자극적인 진행은 없어 뒷목 잡지 않고 가볍게 시청하기에 좋다. 카카오TV와 함께 넷플릭스에서도 방영한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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