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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의 계정공유] '나의 해방일지', 해방과 추앙이 필요한 시대의 드라마

가슴 치는 명대사들의 향연…아닌 척 해도 빠져드는 해방의 쾌감

2022.05.16(Mon) 16:06:58

[비즈한국] “난 내가 괜찮아. 나는, 어? 매력자본이 어마어마한 여자야.”

 

‘나의 해방일지’ 2화에서 염기정(이엘)이 저 대사를 외쳤을 때, 나는 이 드라마가 좀 좋아졌다. 물론, ‘나의 해방일지’에는 명대사가 차고 넘친다. 이제는 일종의 ‘밈(meme)’이 되어 버린 “날 추앙해요”나 “전 해방이 하고 싶어요” 같은 대사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처음 꽂혔던 대사는 저 대사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지만, 어지간한 상황과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고서는 쉽게 내뱉지 못하는 말이기 때문인 것 같다.

 

‘추앙커플’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구씨(손석구)와 삼남매 중 막내인 염미정(김지원). 한 번도 채워진 적 없었다는 미정은 구씨에게 자신을 추앙하라는 선전포고 같은 말을 던지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사진=JTBC 제공

 

‘나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세간의 시선으로 보면 평범하디 평범하다. 아니, 보통 사람들이 갈망하는 사회적 위치에 비해 조금 모자라는 처지일 수도 있다. 리서치 회사 팀장으로 일하는 첫째 염기정, 편의점 본사의 영업사원인 둘째 염창희(이민기), 신용카드 회사 계약직 직원인 셋째 염미정(김지원) 삼남매는 경기도 남부 끝자락, 수원 근처라고 말해야 겨우 남들이 위치를 파악하는 산포시에 산다. 경기도 산포시에 산다는 건(가상의 도시지만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서울에서 밥벌이하는 직장인에게 그 자체로 남들보다 못한 입장이다. ‘직주근접’은커녕 아침 7시에 집을 나서야 출근시간에 맞출 수 있고, 야근이나 약속이라도 있을라면 막차 시간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는, 분명 약점이다. 드라마에서 염미정의 회사 동료들도 무신경하게 내뱉지 않는가. “이사하면 되지 않아?”라고. 그렇다고 그들이 전세금이나 월세를 보태거나, 하다 못해 집을 알아봐 주거나 집들이 선물이라도 사올 것도 아니면서.

 

염씨네 삼남매의 아버지 염제호(천호진)의 싱크대 공사와 밭일 등 각종 허드렛일을 돕던 정체불명의 구씨. 일을 제외한 시간은 매일 소주로 연명하던 그는 미정의 ‘추앙하라’는 제의에 도약하는 새처럼 새로운 기회를 맞는다. 사진=JTBC 제공

 

키워준 은혜는 하해와 같지만, 사람인 이상 다른 집과의 비교도 불가피하다. 마흔을 앞둔 나이에 부모 집에서 밥 얻어먹고 지내는 처지지만, 주말마다 부모를 도와 대파를 뽑고 밭일을 거들어야 하는 상황은 아무것도 안 하고 편하게 부모 집에서 지낼 수 있는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싫을 수밖에 없다. 분명 성실하게 일하는 사회인이지만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스펙도, 재산도, 그럴 듯한 연인이나 배우자도, 하다못해(?) 롤스로이스 같은 차도 없다. 그러니 섣불리 염기정의 자존감이 철철 넘치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다. 혹은 나를 좋아하는 상대에게도 추앙은커녕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하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 말을 들은 당사자가 아무리 나를 이해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가깝고 친밀한 관계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의 관계에는 어떤 기준과 시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장 염기정의 말을 들었던 지현아(전혜진)는 “언니, 솔직히 내가 몇 점짜리인지 얘기해 줘요? 오늘 아주 적나라하게 점수 좀 찍어줘?”라고 대꾸했던 것처럼. 인간을 계급 또는 점수 수치로 책정하는 데 특히 능한 한국사회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물론 다른 사람과의 사랑에도 권력관계가 형성되는데 무조건적인 추앙이라니.

 

삼남매 중 첫째지만 겉으로는 제일 철없어 보이는 염기정(이엘). 동생 미정의 회사 동료이자 아이 딸린 이혼남 조태훈(이기우)에게 반해 소녀 같은 열정을 품게 된다. 사진=JTBC 제공

 

염기정이 아버지의 막일을 돕는 정체 모를 허드렛일꾼 구씨(손석구)에게 “날 추앙해요”라고 요구한 순간, 20세기에나 쓰일 법한 고어(古語)인 ‘추앙’이란 발음이 주는 이질적인 감정에 갸웃했었다. 그런데 드라마가 방영될수록 ‘높이 받들어 우러러봄’이란 뜻의 추앙이 실은 우리에게 무척 필요했던 감정이 아니었나 싶다. ‘해방’이란 단어도 마찬가지. 사내 동호회 활동을 강요하는 회사 측이 보기에 동호회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아 요주의 인물이 된 염미정과 조태훈(이기우), 박상민 부장(박수영)은 ‘해방클럽’이란 동호회를 만든다. 해방이란 단어도 일상에서 흔히 입밖으로 내뱉지 않는 단어다. 사내에서도 ‘해방클럽’이란 이름만 보고 어이없어 하는 반응이었으니까. 그러나 11화에서 허구한날 싫은 소리만 하는 ‘빌런’ 팀장이 미정에게 해방클럽이 뭐에 대한 해방이냐고 물었을 때 “인간한테서요. 지겨운 인간한테서요”라고 말했을 때, 가슴 속에서 펑 터지는 해방감을 느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둘째이자 외아들인 염창희(이민기)는 부모에게는 철딱서니 없는 자식이지만 회사에서는 다른 동료들에게 큰 불만없이 받아들여지는 인물. 가랑비 같은 그의 팔자는 어떤 길로 그를 인도할까. 사진=JTBC 제공

 

그외에도 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대사가 이 드라마에는 차고 넘친다. 6화에서 염창희는 시시각각 자신의 화를 돋우는 회사 선배 때문에 폭발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 은행에 간다. 길고 긴 은행의 대기 라인에서 짜증이 돋워지는 순간, 염창희의 뒤에 있는 남자가 버스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순서를 바꿔줄 수 있느냐고 부탁한다. 꾹꾹 화를 눌러 앉히고 창희가 순서를 양보한 뒤, 남자가 떠나고 ATM 화면에는 ‘잔액이 부족하여 5만 원을 인출할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 이때의 상황을 창희는 친구인 지현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희한하게 그런 타이밍은 귀신같이 안다? 물러나야 할 타이밍. 막 미친놈처럼 폭주하다가도 막 제자리로 돌아와. 주변이 그렇게 흘러. 난 좀 그런 팔자 같아. 가랑비 같은 팔자. 강이나 바다처럼 큰 물줄기가 있는 건 아닌데, 가랑비처럼 티 안 나게 여러 사람 촉촉하게 하는 것.” 가랑비처럼 티 안 나게 여러 사람 촉촉하게 하는 팔자라니, 그 작지만 소중한 마음에 나는 반해 버렸다. 삼남매의 대책 없는 행동이나 일견 ‘또라이’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혀를 끌끌 차다가도, 이렇게 가슴을 치는 곳곳의 대사들을 접하다 보면 작은 위안을 얻고, 그러면서 나와 내 주변에 응원을 보내게 되는 거다.

 

사내에서 동호회를 들지 않은 조태훈과 박상민 부장(박수영), 염미정은 어떻게든 동호회 활동을 해야 ‘관심병사’ 같은 처지에서 벗어날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만든 것이 해방클럽. 추앙만큼이나 옛스러운 단어인 해방의 의미를 드라마는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사진=JTBC 제공

 

‘구씨’ 구자경과 미정이 다시 만나게 될지, 남자의 애를 태우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직진하는 염기정과 그런 미정이 파이팅 넘치게 즐겁지 않아도 되어서 좋은 조태훈의 관계는 어찌될지, 연인보다 더 가까운 친구 사이인 염창희와 지현아는 어떤 관계를 형성해 나갈지 등 궁금함이 쌓이고 매력이 증폭되는 드라마. 물론 이들의 관계의 서사도 궁금하지만, 그들이 계속 즐거운 척 하지 않고, 불행한 척 하지 않고, 정직하게 보면서 살아가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남은 방영분을 기다리게 된다. 아닌 척 해도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지금 얽혀 있는 것에서 해방되고 싶고, 사랑을 넘어서는 무조건적이고 충만한 지지를 받고 싶으니까.

 

염씨 삼남매와 같이 산포시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동네 친구들. 가족만큼이나 끈끈하지만 ‘서울에서 태어났으면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들 사이에서 공공연하다. 그리고 이 공공연한 생각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팽배한 인식이기도 하다. 사진=JTBC 제공

 

같은 곳을 바라보는 ‘추앙커플’ 구씨와 염미정. 구씨는 과거 어둠의 세계에서 활동하던 구자경은 결국 과거에 발목 잡혀 그 세계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미 추앙을 바치고, 그에 상응하는 감정을 받아본 그가 예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진=JTBC 제공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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