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파친코(Pachinko)’ 시즌1의 마지막 화가 공개됐다. 애플티비+(애플티비)에서 지난 3월 25일 시작한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K-OO’라는 명칭이 자연스러운 작금의 한국이 아니라, 1910년대 일제강점기부터 1989년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한국인 가족사를 다룬다. 정확히는 한국(조선)과 일본, 미국을 넘나들지만 어디에도 정서적으로 속하지 못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다룬다. 일제강점기라는 질곡의 역사, ‘자이니치’라 부르는 재일 한국인의 삶을 다룬 작품은 한국인에게는 익숙하지만 이에 대해 세계가 관심을 쏟는 현실은 분명 오묘하다.
‘파친코’는 선자를 중심으로 선자의 부모, 선자의 아들 모자수, 선자의 손자 솔로몬 대까지 4대의 삶을 아우른다. 부산 영도의 가난한 하숙집에서 언청이(구순구개열)로 태어난 선자의 아버지에게 그보다 더 가난한 집의 딸인 선자의 어머니 양진(정인지)이 시집을 가 태어난 선자. 위로 아들 셋을 어릴 적 줄줄이 잃고 겨우 건진 귀한 딸이지만 선자가 태어난 때는 1915년 일제강점기다. 어린 선자(전유나)는 셈이 빠른 영특한 아이다. 부모의 하숙집에서 일본을 욕하는 손님에게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니 알아서 나가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눈치도 빠르다. 그러나 그가 살아가는 조선은 조선이라는 이름을 잃고 일본에게 점령당했다. 거기다 가난한 집에서 여자라고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삶. 앞으로 펼쳐질 선자의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우리에겐 훤히 보인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으로 선자는 단단한 마음의 소유자로 자란다.
당돌한 눈빛의 처녀로 성장한 선자(김민하)의 삶이 격동에 휘말리는 건 한수(이민호)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부터. 부산 영도에 새로 온 생선 중개상 한수는 능력 있는 건 물론이요 훤칠하게 잘생긴 인물로, 위험에 처한 선자를 도와주면서 가까워진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작은 세상에 살고 있던 선자는 한수로 인해 눈을 뜨고, 그를 사랑하게 되며 아이까지 가지게 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이미 일본에 가정이 있는 남자였다. 자신의 아들을 낳아주면 세상을 다 주겠노라는 한수의 제의를 거절하고 선자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밴 자신에게 결혼하자고 제의한 이삭(노상현)을 따라 일본 오사카로 향한다.
‘파친코’는 선자의 연대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젊은 선자와 노년의 선자(윤여정),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미국으로 유학갔다 큰 계약을 성사시키러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손자 솔로몬(진 하) 등 과거와 현재가 수시로 교차하며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방식이다. 시즌1에서 특히 비교되는 것은 선자와 솔로몬의 삶.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경험한 1세대 재일 한국인 선자와 그들에게 지겹도록 고생담을 듣고 자랐으나 자신들 역시 차별받으며 자란 솔로몬. 그들 사이에는 수십 년의 간극이 있다. 자신의 회사에서 염원하는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핵심 부지의 땅주인 재일 한국인 할머니 금자를 설득해야 하는 솔로몬은 할머니 선자까지 동행시키며 땅주인에게 한국인이라는 공통점을 내세우려 하지만 할머니 선자와 달리 한국에서 온 쌀밥의 맛은 모른다. 그러나 계약 당시, ‘너의 할머니여도 이런 상황에서 계약을 하라 하겠느냐’는 금자의 물음에는 결국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게 되는, 피가 당기는 재일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애플티비가 제작비 1000억 원을 투자했다 하여 화제를 모은 ‘파친코’는, 수십 년의 시간과 여러 나라의 모습을 담아내는 대서사시인 만큼 어느 정도 예상되는 그림이 있었다. 사람들의 감정을 한껏 고양시키기 위한 연출과 스펙터클한 영상 등. 그러나 공개된 시즌1은 외적인 것이 아닌 이야기의 완성도에 집중했다. 1920년대 부산 영도의 어시장, 1930년대의 일본 오사카의 한인들이 사는 뒷골목 등 화려하진 않지만 그 시대의 공기마저 끌어온 듯 실감나게 재현된 공간이 눈길을 끈다. 냄새마저 맡아질 듯한 세밀한 디테일은 어떻고. 남편과 함께 오사카로 떠나야 하는 딸 선자를 위해 어머니 양진이 겨우겨우 쌀을 사서 밥을 짓는 장면은 시즌1의 백미 중 하나다. 과장 보태지 않고 그 순간 쌀밥 냄새가 훅 느껴지는 듯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수 분에 달하는 밥을 짓는 장면에서 애플티비가 이 시리즈에 기울인 정성을 가늠할 수 있다.
사실 ‘파친코’는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뜨거운 분노와 회한으로 지난 역사를 그리지는 않는다. 복희(김영옥)의 “만주 공장에 좋은 일거리 있다고 우릴 소개시켜준다카데”라는 말 한마디로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은근히 짚어내고, 7화에서는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을 그려내지만, 우리가 익히 알던 식으로 분노를 유발시키려 하진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독립군들의 참혹한 고문과 고생담을 담은 작품들이나 일본군 위안부의 이야기를 그리며 눈물을 쏙 뺐던 영화 ‘눈길’처럼 ‘파친코’는 직접적인 분노를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분노를 한껏 덜어낸 느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파친코’는 더 은은하고도 강한 울림을 안긴다. 양진이 딸을 위해 짓는 밥 냄새처럼, 선자가 어떻게든 살기 위해 담근 김치의 풋내처럼, 강렬하지는 않아도 계속 곱씹게 되는 강한 여운이 ‘파친코’에 있다.
파친코의 원작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거대한 역사가 휘몰아쳐도, 그 안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위대함을 ‘파친코’는 그려낸다. 파친코를 배경으로 인물들이 춤을 추는 오프닝 영상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색색의 컬러가 화려한 파친코 기계들 사이로 배우들이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은,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소설의 첫 문장과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그 무엇이 우리를 망쳐놓으려 들어도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라는 메시지를, 우리는 ‘파친코’를 통해 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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