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새 정부 정책과제에 ‘산업은행 본사 부산 이전’이 포함된 가운데 KDB산업은행(산업은행)이 자질론까지 거론되면서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문재인 정부 초기인 2017년 취임해 한 차례 연임한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4월 26일 임기를 1년 5개월 남기고 사의를 표명했다. 이 회장 재임 기간 산업은행은 아시아나항공, 대우건설, 금호타이어 등 굵직한 구조조정을 성사시켰지만, 최근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의 인수합병이 무산되면서 책임론이 제기됐다. 야심 차게 추진했던 KDB생명의 네 번째 매각 작업도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정책금융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재조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국민의힘 중심으로 산업은행 역할 재편 논의가 시작되면서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산은 민영화 재추진까지 검토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하지만 성급한 민영화가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세 부문으로 쪼개자는 의견까지 나와
산업은행 무용론이 고개를 든 배경에는 연이은 기업 매각 실패가 있다. 이동걸 회장이 ‘직을 걸겠다’는 표현까지 쓰며 최우선 사업으로 추진했던 대우조선해양 매각은 올해 1월 유럽연합(EU) 공정경쟁당국의 기업결합 반대로 불발됐다. 쌍용차 매각도 인수자인 에디슨모터스 컨소시엄이 인수대금을 내지 못하면서 무산됐다.
2010년 금호아시아나그룹 구조조정 과정에서 떠안은 KDB생명(옛 금호생명)의 경우 네 번째 매각 시도 끝에 JC파트너스와 매매계약을 맺었지만 JC파트너스가 대주주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서 주식매매계약(SPA)을 해제했다. KDB생명에는 지금까지 공적자금 총 1조 원가량이 투입됐다.
여기에 산업은행이 새 정부 정책과제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역할 재편론이 기류를 타고 있다. 4월 27일 인수위가 발표한 윤석열 당선인의 시도별 공약에 산업은행 부산 이전이 포함됐다. 선거철만 되면 국책은행 등 금융공공기관들의 본점 이전이 정치권의 주요 화두가 되곤 했지만, 이번에는 직원들이 느끼는 위기감이 남다르다. 윤 당선인의 용산 집무실 이전 강행 등에 비춰볼 때 속도전으로 밀어붙일 가능성이 있어서다. 대우조선해양 신임 대표 선임, 부산 이전론 등을 두고 친정부 인사로 분류되는 이동걸 회장과 인수위가 대립각을 세워온 까닭에 권한과 역할을 손봐야 한다는 논의에도 불이 붙었다.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는 산업은행을 3개 부문으로 쪼개 구조조정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실 주최로 4월 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정책금융의 문제점과 혁신과제: 산업은행의 역할재편을 중심으로’ 토론회에서 박창균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조정실장은 “정책금융기관의 몸집이 너무 커지면 책무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저탄소 경제, 산업구조 전환 같은 새로운 정책금융 수요에 대응하기 어려워진다”며 “산은 기능을 재편해 중소기업 금융 지원과 상업금융 부문은 다른 기관에 이전하거나 민영화를 추진하고 구조조정 금융과 혁신 기업 투자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화 필요하지만…민영화가 답일까
이 같은 시각은 산업은행을 현재 체제로 유지해선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구정한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정책금융기관은 한 번 설립되면 조직과 규모가 확대되는 경향이 있고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혁신이 어려운 상황도 생긴다”며 “구조조정 해결사로서 정책금융기관 역량에 의문이 제기된다. 국내 산업구조가 4차 산업으로 전환되는 만큼 산업은행의 역할도 진화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산업은행 ‘슬림화’ 주장은 정책금융의 이름으로 부실기업에 지나치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명확한 목적과 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민영화, 역할 재편은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찮다.
재계 관계자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구조조정 시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지만 감시자 역할도 한다. 두산의 경우 ‘자구안으로 탈출했다’고 표현하는 근간에도 산은의 눈치를 봤다는 맥락이 있다”고 말했다.
산업은행 민영화는 이명박 정부에서 한 차례 추진되다가 무산된 바 있다. 2008년 세계적 투자은행(IB) 설립을 목표로 추진됐지만 같은 해 말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며 동력을 잃었다. 2013년 박근혜 정부 때 금융위원회가 정책금융 역할 재정립 방안을 수립하면서 산업은행 민영화는 백지화됐다.
우석진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MB정부에서 산업은행의 정책금융 부문을 떼어내 한국정책금융공사를 분리 신설했지만 다시 산업은행과 통합했다. 몸집이 큰 산업은행의 사이즈를 쪼개면 성과가 나오고 효율성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겠지만 민영화는 크기가 아니라 체질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국정책금융공사는 2009년 한국산업은행의 정책금융 기능을 분리해 세워졌다가 만 5년 만에 산업은행에 재흡수됐다. 당시 고승범 금융위원회 사무처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장안정 기능이 중요해짐에 따라 전문성과 경험을 보유한 한국산업은행의 정책기능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한국산업은행과 유사한 업무를 수행해 정책재원의 비효율성을 유발할 소지가 있어 통합이 필요하다”고 재통합 배경을 밝혔다.
이는 민영화 근거였던 ‘민간과의 금융 마찰 해소’와 일맥상통한다. 당시에도 양 기관 ‘분리’의 논리와 ‘재통합’의 근거가 모순된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에 성급한 민영화보다는 문제점을 찾아 수정·보완하는 방안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우석진 교수는 “잘 관리한 부실기업을 적당한 가격에 팔아 민간에서 활성화되게끔 해야 하는 산업은행이 연이어 기업 매각에 실패하는 건 분명 좋은 신호가 아니다. 세금으로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만큼 산은이 떠안을 기업과 시장논리에 맡길 기업 등을 구분해 지원하는 등 정부의 역할 개입을 축소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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