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 2월 부산시 부암동 서희건설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는 레미콘과 굴착기 등 모든 장비가 일제히 멈췄다. 공사장 입구는 덤프트럭과 승합차로 가로막혔다. 민주노총 건설노조가 소속 조합원 장비로 모든 건설기계를 교체하라며 현장을 봉쇄한 것이다. 계약을 거부하던 시공사는 결국 노조와 협약서를 체결했고, 원래 일하던 기사들은 현장에서 철수했다.
굴착기와 펌프카, 덤프트럭 등은 건설현장의 핵심 장비다. 현장에서는 중장비가 먼저 토목공사를 다진 후 일반 노동자가 투입된다. 이 때문에 건설노조가 공사현장을 점거하는 과정에도 기계설비가 적극 활용된다. 업계에서는 기계장비가 노조의 ‘깃발’에 비유된다. 공사 초기 단계에서 현장을 선점한다는 의미가 있어서다. 업계 관계자는 “장비로 우선 확보해놓는 개념이다. ‘우리 노조’가 가져온 현장이라고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법인사업자도 노조 통해 일감 따낸다
건설노조의 채용 강요는 잡일공, 목수 등 일반 노동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장비 운행 여부만으로도 현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설기계를 앞세운 노조의 압박이 거세다.
건설기계를 운용하는 사람은 건설기계관리법에 따라 건설기계대여업을 등록하고 개인사업자 면허를 발급 받은 사업자다. 굴착기, 펌프카 등을 가지고 있는 지입차주들은 공사현장을 뛰는 ‘사장님’인 셈이다. 노동자의 성격을 가진 사업자라고 볼 수 있다. 건설노조에 가입한 건설기계 사업자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두고는 ‘사장님 노조원’이라는 호칭이 따라 붙는다.
최근 지방 건설현장을 중심으로 건설기계 노조의 ‘일자리 독식’ 사태가 심화하면서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건설기계 차주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기계 한 대를 가진 사업자부터 열 대 이상의 차량을 소유해 운영하는 법인사업자 등이 노조에서 활동하며 부적절하게 일감을 따내고 있다는 내용이다. 전자의 경우 사업장에 소속돼 일하는 특수고용직의 성격이 있어 대법원 판례에 따라 노조원 지위가 사실상 인정된다. 반면 법인사업자의 노조 가입은 위법이다.
건설기계개별연명사업자협의회 관계자는 “건설기계사업자는 본질적으로 사업자다. 포크레인 10대면 매출 연 10억 원 수준인데 20대를 소유한 노조원도 있다. 노조에 들어간 이유나 목적도 노동 환경 개선보다는 자신의 사업을 영위하기 위함이다. 이런 사업자들까지 노조 활동이 가능한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소외, 노조 몸집 키웠다
그렇다면 ‘사장님 노조원’이 건설노조에 가입하고, 건설기계라는 ‘무기’를 쥔 노조가 현장의 주도권을 갖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업계는 건설업의 특수성, 관계 기관의 행정 편의주의가 맞물린 결과라고 말한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현장에서 일하는 건설기계사업자들의 목소리가 배제됐다는 주장이다.
건설기계는 제도적으로 방치됐다. 굴삭기 등 일부 건설기계는 ‘영업 넘버’ 수급 조절 대상이 아니다. 굴삭기 수급 조절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에 위배된다는 판단에서다. 공정 중 사고가 날 경우 가장 위험한 축에 끼는 건설기계지만 자격 등급도 구분하지 않는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건설기계임대차 표준계약서’ 상 가동 시간은 수년째 월 200시간 기준이 적용되고 있다.
또 건설현장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정부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건설기계의 입장을 정확하게 대변하는 주체가 없다. 현재 공법기관인 대한건설기계협회가 그 역할을 하고 있지만, 건설기계를 실제로 소유하고 운영하는 개인사업자가 아닌 화주(지입사)들로 꾸려져 있다. 지입사는 화물차 여러 대를 매입부터 등록, 말소까지 대행해주는 법인이다. 현장의 안전사고, 임금체불 등의 개선을 가장 시급한 문제로 꼽는 개인사업자들과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주성 건설기계개별연명사업자협의회 중앙회장은 “굴착기 사업자가 겪는 체불 문제나 분쟁 등과 직접 연관이 없는 단체가 건설기계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며 “정부가 차량의 등록, 검사, 세무 등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상위 단체의 발언권만 고려해 실제 현장에서 기계를 운영하고 노동하는 사업자는 소외됐다. 이익을 챙기려는 사업자들이 노조에 유입되면서 결과적으로 양대 건설노조의 몸집과 영향력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건설기계사업자들이 국토교통부와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 기관에 찾아가 집회와 시위를 열기도 했지만 지난해 10월 정부가 건설 현장 불법행위 근절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기 전까진 개선 기미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공사기간을 더 이상 지연할 수 없는 건설사와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노조는 대립과 합의를 반복해왔다.
건설사 관계자는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현장은 없다. 레미콘 타설을 위해 도로를 막고, 비산먼지와 소음도 발생한다. 노조가 민원 사항을 찾으며 기계 계약을 요구할 경우 비용 문제가 있다 해도 건설사로서는 일단 합의하는 게 최선이다. 특히 대형 건설사는 그럴 여력도 있어 노조는 채용을 강요하고 시공사는 합의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노동자 권리 보호, 노동 환경 개선이라는 노조 본연의 역할이 폐쇄적으로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설사가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여 협약서를 체결하더라도 이 조건으로 계약하는 건 노조원 뿐이다. 현장에서는 일부 노조가 노조원의 임금을 일명 ‘똥떼기(중개 비용으로 수수료를 떼가는 것)’ 하거나, 비노조원 사업자가 한 달에 6만 원을 내고 조합에 가입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결국 피해를 입는 건 노조에 가입하지 않고 직접 영업을 뛰어 계약을 맺는 개인사업자들이다.
이주성 건설기계개별연명사업자협의회 중앙회장은 “건설현장에서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데 정책 결정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당사자의 목소리가 빠져 있다. 국토부 등 관계 부처에서 행정 편의만 따지는 문제가 가장 크다. 노조에 가입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영업이 불가능한 현 상황에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은경 기자
gong@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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