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기업들은 때론 돈만 가지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결정을 한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법이나 제도를 알면 더욱 자세한 내막을 이해할 수 있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비즈니스 법률’은 비즈니스 흐름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를 소개한다.
이번 글에서 다루는 사안은 과거에는 비교적 쉽게 볼 수 있었던 일이다. 그렇게 오래전 일은 아니고 필자가 진로를 고민하던 10여 년 전에 소문으로 들었던 일이기도 하다. 회사가 임직원을 채용하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채용공고를 내지만 이면에는 채용될 사람이 미리 정해진 경우가 있다. 즉 ‘내정자’가 있다거나 ‘누구누구가 추천했다’는 이유로 채용자가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런데도 채용공고를 내는 건 사규 등 정해진 절차를 무시할 수 없고, 형식적으로라도 공정하고 객관적인 절차를 준수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 같은 가짜 채용공고를 속된 말로 ‘가라(ガら, 가짜라는 의미의 일본어) 공고’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사람 간의 관계가 학연·지연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이다. 그러다 보니 스승, 직장 상사, 정치권 인물 등의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기가 어렵다. 심지어는 인심을 쓰면 나중에 보답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부탁을 반갑게 받기도 한다.
가라 공고 이야기로 돌아가자. 회사 입장에선 아무 배경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응시자를 선별하느라 비용을 지출하느니, 누군가의 추천이나 보증을 받은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 편할 수 있다. 과거에는 놀랍게도 가라 공고에 대한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다. 채용 시즌만 되면 ‘누구의 추천으로 채용됐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인사 담당자가 윗선으로부터 ‘응시자 중 누가 있는데 그 사람 좀 신경 쓰라’는 전화를 받았는데, 발언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해 정말로 신경만 쓰고 채용을 하지 않다가 질책을 받았다는 우스갯소리가 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지원자들은 결과적으로 들러리가 돼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게 된다. 어디 시간과 비용뿐이랴. 나중에 전말을 알게 됐을 때 느끼게 되는 배신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최근 법원 판결을 보면 채용 비리 사안에서 선고되는 형벌의 수위가 가볍지 않다. 법원도 채용 비리를 심각하게 본다는 얘기다. 청탁을 받은 회사 임직원이 인사 담당자에게 청탁과 관련한 이를 채용할 것을 지시한다면 기본적으로 업무방해죄가 성립한다. 많은 사례에서 집행유예 이상의 중한 형벌이 내려졌다.
예를 들어 서울중앙지법 2015고단7551 판결은 “공공기관의 직원채용 업무에 관한 사회 일반의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됐고, 정당한 방법을 통해 취업하고자 하는 대다수 취업준비생에게 박탈감과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중략) 채용 비리를 통해 입사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조직과 기관을 장악하고, 계속해서 다른 부패로 발전해 우리 사회의 공정성을 해치는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폐해는 실로 막대하다”는 이유로 피고인 모두에게 집행유예의 형벌을 선고했다.
그렇다면 인사 청탁으로 채용된 직원은 어떻게 될까? 그 직원이 직접 인사 담당자에게 청탁하지 않았을 수 있고, 심지어 인사 청탁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수 있다. 또한 그 직원은 수년간 성실하게 근무해 어느 정도 신뢰 보호의 원칙에 따라 보호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사후 인사 청탁 또는 채용 비리가 발각되면 해당 직원을 해고하거나 면직시켜야 할까?
이 쟁점에 대해 대법원은 “지원자가 직접 부정행위를 한 경우는 물론이고, 지원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타인이 지원자를 위해 부정행위를 했다면 그 부정행위의 이익을 받게 될 지원자가 부정행위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지원자가 부정행위로 인해 공정하게 선발된 자로 평가될 수 없는 경우에는 그 채용 역시 부정행위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즉 지원자가 청탁하지 않았고 청탁 여부에 대해 알지 못했더라도 합격 취소 사유가 성립한다고 판시했다.
이러한 엄격한 판례를 생각하면, 인사 청탁이 있었던 이상 그 후 수년간 회사에서 성실히 근무했다고 하더라도 신뢰 보호의 원칙에 따라 보호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가라 공고는 채용 절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발주자가 협력업체·시공사 등을 선정하기 위해 경쟁 입찰 공고를 냈지만 사실 낙찰 받을 업체가 내정된 경우가 있다. 발주자가 낙찰자를 미리 내정한 이유는 업체로부터 부정한 청탁을 받았을 수도 있고, 내정된 업체만이 해당 사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가 적용된 IT 구축사업의 경우 입찰공고를 내는 사업 자체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수십 년에 한 번 이런 사업을 발주하는 발주자에게 관련된 경험이 있을 리 없다. 따라서 특정 IT 업체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 IT 업체를 낙찰자로 내정하곤 한다.
이와 같이 발주자가 낙찰자를 내정하는 것을 ‘관제담합(官製談合)’이라고 한다. 발주자가 담합에 관여하는 사례가 공공·관급시장에 많다는 것에 착안해 일본에서 나온 용어다. 사업의 성공적인 수행, 전문 업체의 협조 등의 명목으로 발주자가 낙찰자를 내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형법상 입찰방해죄로 처벌되는 범죄 또는 부정당업자로서 제재받을 수 있는 법 위반행위다.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가라 공고가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착해졌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대나무숲·블라인드 등 익명 커뮤니티가 활성화돼 청탁이나 관련한 의사결정을 숨기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인 것 같다.
정양훈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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