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 금요일, 베를린에서 의미 있는 모임이 열렸다. 한국계 창업자가 세운 독일 스타트업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굳이 한국을 붙이지 않고도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성과를 내는 곳들이다. 이들을 모은 것은 KIC(Korea Innovation Center)로, KIC 유럽은 과학기술부 산하 기관으로 연구재단의 지원을 통해 운영된다. 한국과 유럽의 글로벌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국의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을 지원한다.
KIC는 그동안 베를린시, 베를린시 산하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엔팩(enpact) 등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베를린 현지의 다양한 스타트업들과 스타트업 생태계를 이끌어가는 주요 플레이어들과 활발하게 교류해왔다. 이번에 본격적으로, 그리고 최초로 ‘한국’을 기반으로 하는 창업자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한국 기관이 하는 의례적인 행사일까? 단순히 한국 회사와 한국인을 지원하려는 목적일까? 답은 ‘아니오’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유럽에서 ‘한국’은 일종의 현상과도 같다. BTS, 봉준호, 오징어게임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문화적인 요소뿐만이 아니라 기술적, 혁신적 측면에서 이제 한국은 ‘어나더 레벨’의 관심과 대우를 받고 있다. 오래전 튼튼하고 성능 좋은 ‘미제’라고 했을 때의 미국, ‘메이드 인 저머니’라고 하면 신뢰가 가던 독일처럼, 상당한 브랜드 가치를 이제 한국이 획득했다.
#세계 최고 기술로 유럽 시장을 두드린 스타트업들
먼저 세계 최고의 기술로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스타트업들이 눈에 띈다. AI 경량화 기술로 유럽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노타(Nota)는 2024년부터 유럽의 모든 신차에 탑재되는 운전자 모니터링 시스템(Driver Monitoring System) 분야를 확장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열심히 달려 나가고 있다.
이를 위해 노타는 지난 11월 독일 최고 자동차 회사 다임러(Daimler) 출신 안세리 법인장을 영입했다. 안 법인장은 “노타와 처음 만난 곳도 KIC였다. 나는 독일 대기업 관계자로, 노타는 한국의 스타트업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알게 되었다”라며 KIC의 중간다리 역할을 높이 샀다. 다임러 관계자의 눈에도 노타의 AI 최적화 기술은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다. 고성능 AI 모델의 높은 정확도를 유지하면서 연산량을 최소화하고 속도는 높일 수 있는 AI 최적화 기술은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기업만 가진 특별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2010년 한국에서 창업해 2018년 상장한 재활의료기기 전문기업 네오펙트(Neofect)는 2016년 독일 뮌헨에 법인을 설립했다. 시작은 작았지만, 이제는 늘 한국 스타트업 성공 스토리에 언급될 만큼 좋은 성과를 냈다. 독일 법인을 이끌어가는 이수빈 법인장은 “나를 제외한 15명의 직원 모두가 독일인이다. 독일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등 주변 유럽 국가에까지 진출해서 모두 원격근무(remote work)를 하고 있지만, 이들을 이끌어가는 데에 큰 문제가 없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네오펙트는 뇌졸중 환자의 재활 치료를 돕는 ‘스마트 글로브’를 개발했다. 게임을 통해 즐겁게 재활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2021년 코로나 상황에서도 B2B 영업을 확대해 전년 대비 매출이 2배가량 증가했다.
요즘 가장 핫한 키워드 ‘메타버스’를 들고 독일 문을 두드린 이머시브캐스트(immersivecast)도 눈에 띈다. 클라우드 VR(가상현실)과 차세대 VR 안경을 통한 포토리얼리즘 그래픽을 제공하고, 이를 VRaum이라는 자체 가상공간 플랫폼을 통해 구현할 계획이다. 현재 독일 최대 통신사인 도이체 텔레콤(Deutsche Telekom)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국내 태양광·에너지 IT기업 1위를 달리는 해줌(Haezoom)은 인공위성을 전공한 이수석 법인장과 함께 독일 사업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이수석 법인장은 “태양광에서 시작했지만 다양한 재생에너지 분야를 다룰 예정이고 계속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최근에는 좋은 인재를 영입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혁신가 정신으로 무장한 유학생들이 창업한 스타트업들
독일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직접 창업에 뛰어든 혁신가 그룹도 있다. 독일 자브뤼켄의 헬름홀츠 정보보안 연구소(CISPA Helmholtz Center for Information Security)에서 박사과정을 진행하던 박소현 대표는 박사과정에서 연구하던 아이디어를 들고나와 아예 연구팀과 함께 공동창업을 했다. 창업자 4명 중 유일한 여성이자 아시아인이지만, 팀에서 프로덕트 개발을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박소현 대표는 현대자동차에서 보안 전문가로 일한 경력이 창업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됐다. 그의 회사 엘릭시어(Elexir)는 차량에 탑재되는 소프트웨어를 스마트폰 앱처럼 만들고 바로 탑재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한다. 자브뤼켄뿐만 아니라 베를린의 모빌리티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드라이버리(Drivery)에 입주해 활약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영화 촬영을 공부한 뒤 직접 촬영 기기 개발을 아이템으로 창업한 미르 모션 테크(Mirr Motion Tec)의 성우준 대표 이야기는 이목을 끌었다. 성 대표는 독일의 다양한 펀딩 프로그램에 거의 대부분 도전해 초기 투자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했다. 한국 창업자들이 독일어를 잘 모르고 독일 시스템을 잘 몰라서 정보를 얻기 어려운데, 기회가 된다면 자신이 경험한 좋은 프로그램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코로나로 지금은 ‘깔딱고개’를 넘고 있다”는 성 대표의 한국식 표현에 많은 참석자들이 공감했다.
뮌헨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인 친구들과 창업해 유럽 K-Pop 시장을 석권한 진엔터테인먼트(Jin Entertainment)도 빠질 수 없다. 이제는 유럽을 대표하는 케이팝 이벤트 전문 회사이자 다양한 K-culture 관련 협력사로 유럽에서는 이들에게 대적할 자가 없다. 올 5월 갓세븐(GOT7) 출신 유겸의 독일 단독 투어 콘서트 주최를 맡아 바쁘게 상반기를 보낼 예정이다.
#한국, ‘장르’가 되다
스타트업이 맞닥뜨리는 행정, 회계, 세무 등 다양한 총무 업무를 아이템으로 들고나온 굿워크(GoodWork), 이커머스 전문 스타트업 아보카도 커뮤니케이션(Avocado Communication), 한국계 컴퍼니빌더를 꿈꾸는 123factory 등 다양한 기업이 이날 행사에 참여했다.
베를린자유대학교 인간학연구소 이상엽 소장은 “문화적인 영역뿐 아니라 기술·산업·사회 분야에서 전 세계를 선도하는 역할로 한국은 이제 ‘장르’가 됐다”며 이 현상의 독특함을 강조했다. 이상엽 소장은 매달 한 번씩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모여 함께 공부하고 현안을 논의하는 포럼을 지난 11월부터 운영해왔다. 그는 “앞으로 이들을 만나게 하고, 엮고, 유럽을 넘어 미국을 비롯한 다른 지역까지 넓혀가며 이 장르를 좀 더 큰 물결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날 자리에 함께한 주베를린 한국대사관 자문 변호사 이재윤 변호사는 “네 살 때 독일에 건너와 베를린에서 계속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현상을 보면 남다른 감정을 느낀다. 어릴 때는 한국을 설명하는 게 굉장히 어려웠는데, 지금은 한국 하면 힙한 곳, 앞선 곳이라는 긍정적인 인식이 많다”며 앞으로 한국 스타트업을 위해 법률 전문가로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연일 들리는 K로 시작하는 해외 뉴스들이 때로는 ‘국뽕’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독일 스타트업계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면 이것이 환상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이렇게 글로벌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경험하다 보면, 가끔 이곳 베를린이 독일도 한국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 새로운 세상 같다. 혁신이 가져다준 새로운 시공간이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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