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연상호의 시대인가 보다. 티빙에서 매주 금요일 2편씩 공개 중인 12부작 드라마 ‘돼지의 왕’을 보고 있으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돼지의 왕’은 연상호 감독의 동명 애니메이션 영화(2011)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20년 전 친구로부터의 메시지와 함께 시작된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을 그리는데, 과거의 이야기는 원작과 흡사하지만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현재의 전개는 원작과 아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연상호의 디스토피아적 감성은 유효하다.
‘돼지의 왕’은 힘과 성적, 집안의 경제적 수준 등을 기준으로 계급화돼 있는 어느 중학교 교실을 무대로 아이들 사이에서 잔인하게 자행되는 학교 폭력을 낱낱이 보여준다. 이 잔혹한 학교 폭력은 20년이 지난 이후에도 누군가의 트라우마로 남게 되고, 드라마는 이 트라우마가 어떤 계기로 표출되어 연쇄살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주목한다. 연쇄살인의 주범은 20년 전 하루가 멀다 하고 성추행과 폭력을 당하던 황경민(김동욱, 아역 이찬유), 그리고 그를 뒤쫓는 인물은 서울 광수대 형사이자 황경민과 같은 반 친구였던 정종석(김성규, 아역 심현서)이다. 원작이 황경민이 회사 부도 이후 충동적으로 아내를 죽이고 정종석에게 연락해 만나서 과거를 회고하는 식이라면, 드라마는 어른이 된 황경민의 사적 복수극을 펼치며 스릴러 장르를 접목시켰다. 때문에 잔혹함의 정도가 원작의 그것을 훨씬 웃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지상파와 동시 방영이 아닌 OTT로 독점 공개된 걸 보라.
과거 주무대인 신석중학교는 철저한 계급사회다. 어린 경민은 아버지가 직업여성이 나오는 유흥업소를 운영한다는 이유로 ‘포주 아들’이라 불리며 멸시를 당하고, 어린 종석 또한 가난한 생선 장수 부모를 뒀다는 이유로 경민과 함께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경민과 종석의 반을 쥐락펴락하는 인물은 공부 잘하는 반장이자 의사 집안 아들인 강민(오민석, 아역 문성현)과 그 수하들. 원작은 권력을 쥐고 폭력을 저지르는 가해자들을 ‘개’로, 그들 밑에서 짓밟히는 경민과 종석 같은 약자들을 ‘돼지’로 상징한다. 가해자들은 공공연하게 성추행을 자행하고, ‘자살놀이’란 이름으로 피해자 스스로를 자해하게 만드는 등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폭력을 가한다. 눈여겨볼 건 그 강민 또한 학교의 최고 권력자는 아니라는 것. 3학년인 최고 권력자 김종빈이 통칭 ‘A짱’으로 나오고, 강민은 그 밑의 밑인 ‘C짱’ 정도로 묘사된다. 어쨌든 반 내에서는 최고 권력자인 강민을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이는 슬프게도 담임교사인 최석기(이경영). 강민의 폭행을 고발한 종석의 입을 막은 것도, 강민과 싸우는 종석을 보고 ‘학부모 일일교사 체험’이라는 행사를 열어 의사인 강민 아버지와 생선장수인 종석 어머니를 아이들 앞에서 비교시키며 종석을 굴복시킨 것도 최석기다.
생각해 보면 이런 폭력의 시스템은 아주 오래 전부터 보아왔던 것이다. 이문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의 부조리한 권력 남용과 폭행, 그를 넌지시 묵인하는 교사와 학우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던 것을 기억해 보라.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화제를 모았던 ‘펜트하우스’ ‘지금 우리 학교는’ ‘소년심판’ 등 무수히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점점 더 잔혹하고 악랄해지는 학교 폭력과 이를 수수방관하는 학교의 모습을 보여왔다. ‘돼지의 왕’에서 묘사되는 20년 전 학교 폭력이 지금 없다고 자신할 수 없는 수 있나? 아마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돼지의 왕’은 오랫동안 대물림된 폭력이 결코 끊이지 않고 되풀이되고 있음을 절망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돼지의 왕’은 ‘모범택시’ ‘빈센조’ ‘군검사 도베르만’ 등으로 이어지는 최근의 사적 복수극과는 궤를 달리할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초반, 강민의 수하이자 황경민을 지독하게 괴롭혔던 안정희(최광제, 아역 송승환)를 경민이 죽이는 과정은 아무리 고수위의 폭력 묘사로 둔감해 있는 현대인이라도 ‘사이다’라고 두둔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다. 대본을 맡은 탁재영 작가가 화상 인터뷰에서 ‘시청자 분들이 경민이 행하는 사적인 복수가 정당한가 하는 고민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라며 잔혹한 수위에 대해 설명한 데다, 드라마 중반부에 등장한 김철(최현진)이란 인물에 대한 묘사 또한 폭력에 대항하는 대중문화 속 주인공들의 사적 복수를 ‘사이다’라고 명명하기 어렵게 만들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연상호 원작을 훌륭하게 각색한 대본, 그리고 대본 위에서 뛰노는 배우들이 자칫 외면하고 싶을 만큼 암울한 ‘돼지의 왕’을 이끄는 견인차다. 특히 ‘믿고 보는 배우’로 단단히 자리 잡은 김동욱은 분노와 절망을 오가는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뛰어난 몰입감을 보여준다. ‘범죄도시’ ‘킹덤’ ‘악인전’ 등 강렬한 역할을 지나 학폭 피해자이면서 경민을 저지해야 하는 형사 종석을 맡은 김성규는 김철의 환영을 보기 시작한 6화 이후부터 더욱 복잡다단한 심리를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실사 영화 ‘부산행’을 시작으로 ‘염력’ ‘반도’, 드라마 ‘방법’ ‘지옥’ 등 대부분의 작품에서 지독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낸 연상호. 넷플릭스 ‘지옥’으로 전 세계가 그의 세계관에 홀렸던 게 엊그제 일인데, 지금은 그의 11년 전 작품 ‘돼지의 왕’이 더욱 확장된 세계관으로 제작되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공교롭게도(?) 오는 4월 29일부터 티빙에서 방영하는 ‘괴이’ 또한 연상호가 극본을 맡았으니, 한동안 우리는 연상호의 세계를 지켜보게 될 전망이다. 부디 흥미로만 끝나지 않고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 그렇지 않고는 이 모든 것이 너무 슬프게 잔혹하지 않은가.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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