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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조선 최초 왕후'의 묘가 왜 이리 초라할까, 정릉

태조 계비 신덕왕후 능, 정동에 있다가 의붓아들 이방원이 북악산 자락으로 옮겨

2022.03.22(Tue) 22:47:31

[비즈한국] 서울 덕수궁 주변 지명이 정동인 것은 정릉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에 정릉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정릉은 북악산 자락에 있다. 그리고 정릉에는 조선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혼자 잠들어 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태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신덕왕후가 어쩌다 홀로 외로이 정릉에 묻히게 되었을까?

 

조선 태조의 계비이자 조선의 첫 왕후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 능침.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사진=구완회 제공

 

#‘운명적인’ 만남에서 정치적 동반자로

 

정릉은 선릉과 함께 주택가에 위치한 몇 안 되는 조선왕릉 중 하나다. 동네 사람들이 자주 와서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하는 생활공간이기도 하다. 능 주변으로는 3km에 가까운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문도 이른 아침(6시)에 연다. 

 

정릉은 작다. 왕후 혼자 묻혀 있는 단릉인 데다 병풍석도 난간석도 없는 봉분은 왕릉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작다. 하지만 정릉이 원래 장소인 정동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무덤의 주인공 신덕왕후의 권세가 대단했고, 남편 태조의 사랑 또한 각별했기 때문이다. 

 

태조와 신덕왕후가 만난 것은 조선 건국 이전의 일이다. 어느 날 사냥에 나선 태조가 목이 말라 우물가에서 물을 뜨던 처자에게 물을 청했는데, 물이 담긴 바가지에는 버들잎 몇 장이 떠 있더란다. 급히 마시다 탈이라도 날까, 배려를 한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둘은 혼인을 했고, 조선의 개국 과정에서 동지적 관계로 발전했다. 

 

정릉 홍살문에서 본 정자각. 사진=구완회 제공

 

고려말 새 왕조를 세우려는 태조와 이를 막으려는 정몽주가 한창 힘겨루기를 할 무렵, 태조가 말에서 떨어져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정몽주는 이를 계기로 태조를 제거하려 했는데, 이 사실을 눈치챈 신덕왕후가 생모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이방원에게 알려 태조를 구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자 태조는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며 그를 크게 나무랐는데, 이때 신덕왕후는 이방원을 두둔하며 태조의 분노를 가라앉혔단다. 

 

하지만 새 왕조를 세울 때까지 똘똘 뭉쳐 함께 난관을 헤쳐왔던 신덕왕후와 이방원이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일이 생긴다. 조선 개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방원과 그의 형제들을 제치고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 방석이 세자에 책봉된 것이다. 이 일은 신덕왕후의 정치적 야심과 왕권을 견제하려는 정도전 등의 개국공신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릉의 석물이 청계천으로 간 까닭은?

 

양자 사이에 갈등이 깊어갈 무렵, 신덕왕후가 세상을 뜬다. 태조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성 안 경복궁 근처에 정릉을 조성하고 곁에 흥천사를 세웠다. 태조는 수시로 공사 현장을 찾아 일꾼들을 격려했을 정도로 사랑하는 왕후의 능과 사찰 건립에 정성을 다했다. 당연히 자신도 죽은 뒤에는 신덕왕후와 함께 묻힐 생각이었으므로 정릉의 규모는 컸다. 공사를 마친 후 태조는 자주 정릉과 흥천사를 찾았다.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흥천사의 아침 예불 소리를 듣고서야 식사를 했으며, 능에 재를 올리는 저녁 종소리가 들려야 잠자리에 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신덕왕후의 죽음이 태조에겐 슬픔이었으나 이방원에게는 기회였다. 방원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실권을 잡고 결국 조선의 제3대 왕, 태종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자마자 계모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신덕왕후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비각에 모셔진 신덕왕후 비석. 사진=구완회 제공

 

태종은 우선 신덕왕후를 왕비에서 후궁으로 격하했다. 그리고 정릉을 사대문 밖, 그러니까 지금의 자리로 옮겨버렸다. 규모를 줄이는 것은 물론 무덤의 봉분조차 밀어버리라 명령했다. 압권은 정릉에서 나온 석물을 청계천 광통교 보수공사에 사용해 백성들이 밟고 지나가게 한 일이다. 지금 보는 보잘것없는 정릉의 모습조차 후대에 복원한 것이란다. 태종 대의 정릉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고. 평소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고 싶어했던 태조는 동구릉에 홀로 쓸쓸히 잠들어 있다.​

 

정릉의 봉분은 초라하다. 무인석-문인석으로 이어지는 다른 왕릉과 달리 정릉에는 문인석뿐이다. 버들잎으로 만난 인연이 함께 새 왕조를 열면서 꽃을 피웠으나, 결국 이렇게 쓸쓸한 무덤으로 끝을 맺었다. 태조와 신덕왕후는 행복했던 걸까, 불행했던 걸까?

 

위에서 내려다본 정자각과 비각, 수복방. 애초 정동에 있던 정릉은 태종에 의해 사대문 밖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사진=구완회 제공

 

<여행정보>


정릉 

△주소: 서울시 성북구 아리랑로19길 116

△문의: 02-914-5122

△이용시간: 06:00~17:30, 월요일 휴무

 

필자 구완회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여성중앙’, ‘프라이데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여행출판팀장으로 ‘세계를 간다’, ‘100배 즐기기’ 등의 여행 가이드북 시리즈를 총괄했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역사와 여행 이야기를 쓰고 있다.​​​​​​​​​​​​​

구완회 여행작가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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