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다 때려치우고 지방 내려가서 OO나 하며 살까.’ 도심의 직장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흔히 내뱉는 소리다. 여기서 OO는 농사든, 치킨집이든, 책방이든, 펜션이든 저마다 다르겠지만 어찌되었든 내리찍는 상사와 치받는 부하직원 사이에서 톱니바퀴처럼 살고 싶지 않아 선택하는 일종의 피난처란 점은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도심의 직장인들이 쉽게 내뱉는 그 피난처는 엄연히 누군가의 생존 현장.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밥을 벌어먹고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잔잔한 힐링을 안겨다 주었던 예능 프로그램 ‘어쩌다 사장’은 그 점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간 바 있다.
배우 차태현과 조인성을 불러 내어 강원도 화천군의 작은 시골 마을 슈퍼를 맡겼던 ‘어쩌다 사장’은 수십년 간 한결같이 생업에 종사하며 변변한 휴가도 보내지 못한 사장님이 휴가를 떠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시즌1의 강원도 화천군의 자그마한 원천상회 사장님도, 시즌2의 대형 할인마트 사장님도 그곳을 지키느라 제대로 된 휴가는 수십 년 만에 처음이랬다. 이른바 ‘사무실’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은 대부분 주 5일을 일하고 이틀을 쉬고, 아무리 못해도 하루는 쉰다. 그러나 사장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것이 내 책임인 자영업자의 현실은 다르다.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이 많다고 해도 내 손길이 깃들어야 제대로 돌아갈 것이고, 어느 정도 직원을 쓸 정도로 규모 있지 않은 경우에는 내 몸이 바스라지는 느낌으로 쉼없이 일해야 한다.
고작(?) 시골 슈퍼 운영에도 쩔쩔맸던 우리의 ‘사장즈’ 차태현과 조인성은, 시즌2에서는 무려 정육점까지 포함하고 있는 대형 할인마트를 열흘 동안 도맡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시즌2 예고편을 보며 어마어마하게(?) 규모가 확장된 것을 보고 조금 실망했었다. ‘어쩌다 사장’이 시즌1에서 보여준 시골 마을의 넉넉한 인심과 마음씨를 보여주기엔 너무 규모가 커진 게 아닌가 싶었거든. 짧더라도 손님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포착하며 힐링을 안겨다 준 고유의 ‘결’이 사라질 것 같다는 섣부른 우려가 들었다. 그러나 웬걸, ‘어쩌다 사장2’는 시즌1에서 보여준 따스함은 견지하되, 확장된 규모만큼 다양하게 업그레이드된 손님들, 그에 맞춰 늘어난 아르바이트생들의 웃픈 고군분투를 곁들여 힐링과 재미를 다 잡는 추세다.
나주시 공산면의 이 마트는 규모는 커졌어도 시즌1의 시골 마을 사랑방 같던 슈퍼의 기능을 그대로 갖췄다. 매일 학생들의 점심을 책임지는 공부방에 식재료를 배달 나가고, 이웃한 중국집이나 식당들의 부재료도 책임지며, 버스를 기다리는 손님들의 대기소 역할도 맡는다. 그것은 이 마트뿐만이 아니다. 아침마다 조인성은 마트 맞은편의 작은 의원 문을 열어놓는 소임을 인계받았는데, 이는 이른 아침 버스를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 개방된 또 다른 사랑방인 것. 축산업과 낙농업, 식음료업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라면과 우동을 먹으며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도시인을 신선하게 자극시키고, 제법 큰 지역 같으면서도 오며 가며 지나치는 손님들끼리 서로의 안부를 물을 만큼 살아 있는 이웃의 정은 삭막한 도시인의 감성을 두드린다. 수기가 아닌 바코드로 가격을 인식하는 현대적인(!) 시스템으로 바뀌었지만 ‘어쩌다 사장’이 시청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고유의 결은 이처럼 유효하다. 역시, 제작진은 다 생각이 있었던 거다.
‘어쩌다 사장’은 여러 가지 긍정적 감정을 선사하는데, 그중 가장 의미 있는 건 은연중에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선한 의지를 북돋는다는 거다. 시즌2의 마트나 아침부터 문을 열어 두는 맞은편 의원은 버스 정류장이 아님에도 주민들에게 기꺼이 자신들의 장소를 제공한다. 자신에게는 귀찮을 수 있는 그 작은 마음씨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불편을 달랠 것인지 생각해 보면 마음이 따스해지지 않나? 생전 처음 보는 청년 이광수에게 불쑥 “새해에는 좋은 일만 보고, 건강하구”라며 덕담을 건네는 할머니의 몇 마디가 얼마나 따숩고도 아련한가.
‘어쩌다 사장’을 보다 보면 작은 말 한 마디, 작은 행동 하나, 작은 눈빛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잔잔한 울림을 주는지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불현듯 돌아보게 되는 거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저렇게 따스하고 친절한 사람인 적이 있었나 하고. 몸이 바스라질 정도로 힘겹게 생업에 종사할지라도 남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데, 나는 고작 스트레스 좀 받는다고 생면부지의 서비스업 종사자들에게 불친절하지는 않았나 하는 반성. 툭 내뱉는 “영수증은 됐어요” 말고, “고맙습니다”나 “좋은 하루 되세요”나 “수고가 많으세요” 같은 일상적인 인사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깨닫고 있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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