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미디어에 등장한 강렬한 이미지에 가려 잘 모르거나 상상이 안 되는 나라들이 있다. 불가리아도 그 중 하나다. 우리에게는 요구르트를 많이 먹는 장수의 나라,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지점에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으로 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불가리아에 풍부한 IT 인력과 인프라를 바탕으로 주목할 만한 스타트업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당이 집권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민주화 바람이 불어 1990년 일당독재가 사라질 때까지 불가리아는 오랫동안 공산주의 체제였다. 그 시기에 불가리아는 공산주의 국가의 경제협력기구 코메콘(COMECON) 지역의 컴퓨터 40%를 생산했고, 컴퓨터 하드웨어를 생산하는 산업에만 약 30만 명이 종사했다. 그래서 불가리아에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별명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공산주의 체제 붕괴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치 경제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기존 컴퓨터 관련 산업이 고스란히 테크 기반 산업으로 옮겨온 모양새다.
불가리아에서는 현재 전국 38개 이상의 교육기관에서 매년 5000명 이상의 ICT 분야 졸업생을 배출한다. 220개 고등학교에서 프로그래밍 언어 수업을 하면서 다양한 IT 회사들과 협력해 인턴십뿐만 아니라 졸업 후 바로 취업할 수 있는 일자리도 제공한다. 또 불가리아는 1959년 시작된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10위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보다 앞선 실력이다. 스타트업을 이끌어가는 것이 테크 기반 회사들이기 때문에 이런 통계는 상당히 의미 있다.
#IT 아웃소싱 선도국에서 스타트업 허브로
전 세계 대다수 기업이 적은 비용으로 좋은 결과를 내고 싶을 때, 고급 인력이 많은 아시아와 동유럽 국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 중에서도 불가리아는 전 세계에서 아웃소싱 산업이 세 번째로 발달한 나라다. 유럽 어느 지역에서든 비행기로 2시간이면 도달하고, EU 회원국이라는 점이 큰 강점이다. 인접국 터키를 통해 중동 진출에도 유리하기 때문에 전략적인 위치로 주목받았다. 특히 불가리아인의 46%는 최소 한 개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고, 대부분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글로벌 기업들이 선호한다. 불가리아 IT 회사들은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순으로 IT 서비스를 수출하고 있다. 아웃소싱 산업은 불가리아 GDP의 5.2%에 달할 정도로 비중이 큰 데다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저임금, 고숙련 노동자들이 많은 좋은 시장이라는 것은 ‘사용자’인 글로벌 대기업 관점의 서술이다. ‘기술은 뛰어나지만, 돈은 글로벌 기업들이 가져간다’는 사실을 포장한 꽤 아픈 말이다. 이런 문제의식이 불가리아에서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실제로 IBM, SAP 등 불가리아에 진출한 글로벌 대기업은 지금까지 대부분 기술 지원을 하는 백엔드 IT 운영 부문을 맡겼지만, 이제는 점차 제품 개발로 옮겨가는 추세다. 이에 따라 기존에 아웃소싱만 하던 회사들도 스타트업으로서 새로운 기회가 생겨나고 있다.
스타트업 전문매체 크런치베이스(Crunchbase)에 따르면 현재 불가리아에는 약 775개의 스타트업이 있으며, 이들은 불가리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 VC(벤처캐피털)들로부터 약 2억 2500만 달러의 투자를 받았다.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네덜란드에서는 1432개의 스타트업이 약 32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 네덜란드가 불가리아보다 인구는 2.5배, GDP는 10배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가리아의 숨은 저력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IT 아웃소싱 스타트업의 도전, 제타 시스템즈
불가리아의 이런 산업 구조와 변화를 아주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스타트업이 있다. 제타 시스템즈(Zetta Systems)는 2014년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서 창업한 IT 아웃소싱 기업으로, 지금은 스타트업으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제타 시스템즈는 기업들을 위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IT 시스템을 설계하고, 클라우드를 관리해주는 다양한 IT 서비스를 제공한다. 요즘 개발자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주제인 데브옵스(DevOps: 프로젝트를 만들고 배포하고 테스트하는, 개발과 운영 업무를 융합해서 개발하는 방식), 세크옵스(SecOps: 보안과 운영을 분리하지 않고 융합해 운영하는 방식), SRE(Site Reliability Engineering: IT 서비스나 제품이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이트 안정성 엔지니어링)를 고객사의 필요에 맞게 모두 제공한다.
넷플릭스, 구글과 같은 글로벌 IT 기업들은 이런 개념 제안과 실천을 통해 개발과 운영 과정에서 해소되지 않는 어려움을 해결하는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실제 개발팀에서 이런 방식을 사용하고 적용하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회사에 개발팀이 있더라도 중간중간 해결되지 않는 이런 구멍을 제타 시스템즈는 전문 IT 컨설턴트로서 개발팀 문화와 조직 관리에 지원했다.
개발팀이 없는 회사에는 직접 IT팀이 되어 전 세계 어디에서도 1년 365일 자체 IT팀처럼 운영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제타 시스템즈의 기술 디렉터 페타 페트로프(Peter Petrov), 세일즈 디렉터 칼로이안 파르체프(Kaloian Parchev)는 인터뷰에서 “그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스타트업을 위한 스타트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면서 고객사의 사례를 소개했다.
성장이 빠른 스타트업에서는 인력이 늘어나는 속도를 IT 인프라가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제타의 고객사 중 한 곳은 2년 동안 직원이 2명에서 300명으로 늘었다. IT 개발도 동시에 진행돼야 했지만, 사람을 채용하는 데 시간이 소모돼 IT팀을 꾸리는 자체가 오히려 회사 성장에 병목 현상을 초래했다. 이때 제타 시스템즈는 회사의 개발 전략을 함께 논의하고, 소프트웨어에서 하드웨어를 공급하는 전 IT 관련 과정을 설계했다. “단순히 아웃소싱 IT 업체가 아니라 고객사의 한 팀으로서 함께 회사를 만들어간다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 이들의 이야기다.
제타 시스템즈는 AWS, 구글 클라우드, 마이크로소프트 애저의 공식 파트너사다. 고객사가 어떤 시스템을 이용하는지와 무관하게 최적의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의미다. “우리에게는 이미 기술이 있었고 고객사가 있었기 때문에 투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유럽 내 기술 지원 자금인 호라이즌 2020(Horizon 2020)등의 일부 지원사업을 신청했지만, 사업 시작과 동시에 불가리아 이외의 시장인 독일, 영국에 눈을 돌리면서 고객사가 생겼기 때문에 당장의 매출을 유지할 수 있었다.” IT 아웃소싱 기업으로 출발할 당시를 이들은 이렇게 회고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장기화되고 어디서든 원격으로 일하고 IT 관리도 할 수 있게 되면서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었다. 이제는 ‘스타트업의 초심’으로 돌아가 스케일업(Scale-up)도 하고 투자자도 찾으려는 중이다. “코로나로 오히려 물리적 거리를 느꼈던 세상이 온라인에서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아무런 연결점이 없어 보이는 한국과 불가리아가 온라인, 클라우드 공간에서 아주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웃소싱 서비스로 유럽 기업에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생각에 머물렀던 제타 시스템즈는 코로나 위기를 계기로 더 큰 세계 시장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아마존과 구글이 그랬듯 이제는 주도권을 쥐고 선두하는 신예로서 당당히 출사표를 내던졌다. 이들의 성장기는 불가리아 IT 생태계가 점점 스타트업의 허브로 발전하는 모습과 무척 닮았다. 세계 질서가 조금씩 재편되는 가운데, 견고한 질서에 균열을 내는 이러한 스타트업들의 존재는 늘 반갑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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