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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의 계정공유] 뉴욕 사교계를 침범한 믿음의 벨트, '애나 만들기'

가짜 셀럽의 실화를 다룬 흥미진진한 가십…애나를 통해 비쳐진 인간 군상의 욕망 그려내

2022.02.22(Tue) 12:45:54

[비즈한국] 몇 년 전 뉴욕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가짜 상속녀 사건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애나 만들기(Inventing Anna)’로 제작됐다. 자신을 신탁기금 6000만 달러를 지닌 독일 출신 상속녀 ‘애나 델비’라고 명명한 이 젊은 여성은 다수의 절도 및 사기 혐의로 구속되어 정체가 발각되었음에도 재판 과정에서 스타일리스트를 고용해 ‘법정 패션’을 선보이는 등 화제를 모았다. 가짜 상속녀, 화려한 뉴욕 상류층의 사교계, 절도와 사기라는 키워드의 결합은 수많은 스토리텔러와 크리에이터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무려 ‘그레이 아나토미’ ‘스캔들’ ‘브리저튼으로 유명한 스타 프로듀서 겸 각본가 숀다 라임스가 이 이야기를 선택했으니까.

 

동유럽 억양을 쓰고, 문화예술에 깊은 안목을 보이며, 명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도배한 애나 델비. 스스로 7개 국어를 구사하고, 사진 같은 기억력을 지녔다고 묘사한 애나 델비는 뉴욕에 자신의 이름을 딴 최고급 사교 클럽을 만들고자 한다.

 

드라마는 절도와 사기 혐의로 구속된, 일명 애나 델비로 알려진 애나 소로킨(줄리아 가너)에게 맨해튼 매거진 기자 비비안 켄트(애나 클럼스키)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실상 가진 게 전혀 없는 스물다섯의 젊은 여성이 뉴욕 사교계 명사들을 쥐락펴락 농락했다는 점에서 기삿거리가 된다는 판단이 들었을 것이다. 동유럽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고, 고급 호텔에서 100달러짜리 지폐를 물쓰듯 팁으로 건네며, 명사들과 함께 호화 레스토랑과 명품숍을 전전하며 그 삶을 인스타그램에 전시했던 ‘셀럽’ 상속녀가 사실 가짜였다니,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가십이란 말인가.

 

애나의 뉴욕 초기 생활에 도움을 준 인물들. 스타트업에 종사하던 남자친구 체이스가 그녀에게 부유한 상속녀의 생활을 영위케 했다면, 자선 사업가 노라는 방대한 인맥으로 애나에게 ‘믿음의 벨트’가 되어 주었다. 유명 패션 디자이너 발 등 사교계의 셀러브리티들도 마찬가지.

 

‘애나 만들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러시아 태생의 냉난방 기기를 판매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애나 소로킨이 어떻게 애나 델비란 이름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느냐다. 미국의 상류층, 예술계 명사,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은 생각보다 허술하게 애나 델비에게 사로잡힌다. 그건 애나가 걸친 비싼 옷과 자주 오가는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 예술품을 바라보는 심미안에도 기인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유명한 사람과의 친분, 그러니까 영화 ‘기생충’의 사모님 연교가 말했던 일종의 ‘믿음의 벨트’ 덕분이다.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남자친구 체이스를 사귄 애나는 스물다섯 살이 되기 전까지는 신탁기금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주변에 인지시키며 남자친구의 돈으로 럭셔리한 시간을 보내는데, 이 와중 뉴욕의 명사이자 자선 사업가인 노라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뉴욕의 상류층 명사들을 소개받게 된다. 애나 델비 재단(Anna Delvey Foundation)이란 이름으로 최고급 사교 클럽을 만들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금융계에 거액의 대출을 시도하는 것도 이때부터. 잘못된 믿음의 벨트로 속고 속이는 사기 사건은 ‘기생충’에서 그랬듯, 현실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청담동 주식부자’로 알려졌던 금융사기범이나 정관계 인사들과의 커넥션으로 화제를 모았던 가짜 수산업자 사기 사건 등이 대표적인 예. 특히 가짜 수산업자 사기 사건에서 사기범의 광범위한 움직임의 시작이 발 넓은 언론인 출신의 소개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뉴욕에서 어느 정도 정착한 뒤, 애나는 본격적으로 ‘애나 델비 재단’을 만들기 위해 거짓으로 쌓은 인맥을 활용하여 금융계에서 거액의 대출을 받고자 한다. 20만 달러를 실제로 대출받았고, 포트리스와는 거의 대출 직전까지 성공했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고, 듣고 싶어하는 것만 들으려 한다는 점도 애나 소로킨이 애나 델비가 될 수 있는 포인트였다. 부자로 보이는 몇 가지 요소가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이 그를 확인시켜주니 뉴욕의 사교계는 애나 델비를 상속녀로 믿었다. 그러니 흔쾌히 전세기를 빌려주고, 카드 결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에 자기 카드를 대신 빌려주고 했던 것. 애나 델비가 돈 많은 상속녀인 이상 자신과 어울리고 친하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상류층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 애나에겐 호텔 컨시어지로 일하는 네프,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는 레이첼, 라이프 코치이자 트레이너인 케이시처럼 각자의 영역에서 영향력은 있지만 상류층은 아닌 친구들도 있었는데, 이들에게도 애나는 부자여야만 하는 존재였다. 돈이 곧 능력인 21세기 사회에서 아등바등 일하지 않고도 돈이 많다는 건 능력보다도 우월한,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일약 화제를 모았던 유튜버가 가품 착용 논란을 빚었을 때, 가품 착용 자체보다는 ‘찐부자가 아닌데 찐부자 행세를 했다’는 포인트에서 대중이 더욱 분개한 걸 생각해보라.

 

애나에게 관심을 가지며 지속적으로 인터뷰와 취재를 진행하는 기자 비비안 켄트. 과거 기사 하나로 커리어가 완전히 무너졌기에 애나의 인터뷰를 성공시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출산 직전까지 기사에 심혈을 기울이던 비비안은 어느새 애나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애증의 모습도 보인다.

 

‘애나 만들기’의 또 다른 묘미는 애나를 취재하려는 기자 비비안과 애나의 변호사를 맡은 토드, 그리고 애나가 부자일 거란 믿음을 거의 끝까지 가져간 친구 네프의 관점으로 사건과 인물을 바라보는 거다. 사건 초반부터 애나에게 관심을 보인 비비안 켄트는 과거 잘못된 기사 하나로 억울하게 자신의 커리어 전체를 날려 버린 인물이다. 그에게 애나 델비는 자신의 커리어를 단숨에 올려줄 수 있는 동아줄인 셈이다. 애나의 변호사 토드(아리안 모아이드)도 상황은 비슷하다. 부잣집 딸인 아내 덕분에 상류층 생활에 발을 걸치고 있지만, 항상 자신이 그들의 발렛파킹을 해야 하는 처지인 것 같은 초조한 심리를 지녔기에 애나의 사건으로 어떻게든 자력으로 스타 변호사가 되고 싶다. 친구들 중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애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네프(알렉시스 플로이드)의 심리 또한 복잡다단해 보인다. 얼핏 ‘시녀 친구’처럼 보이지만, 얻을 수 있는 콩고물보다는 친구의 성공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심리가 강해 보인다. 이는 애나와 애증과도 비슷한 관계를 성립하는 비비안이나 토드에게도 해당되어 심리학적인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왼쪽부터) 라이프 코치 겸 트레이너 케이시, 잡지사 에디터 레이첼, 애나 델비, 그리고 호텔 컨시어지인 네프. 재미난 건 이 중 금전적으로 가장 큰 손해를 입고 정신적 피해를 입은 인물은 레이첼이지만, 애나와의 일화를 글로 써 거액의 판권을 얻는 것도 레이첼이란 사실이다. 과연 레이첼은 애나를 가짜 상속녀로 만드는 일련의 인물들에서 무고한 사람인가? 글쎄.

 

‘이 모든 이야기는 실화다. 완전히 꾸며낸 부분만 제외하고’라는 문구를 달아 실화와 허구가 적절히 섞여 있음을 명시하며 어디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흥미를 자아내는 ‘애나 만들기’. 고전 영화 ‘태양은 가득히’로 비롯된 리플리 증후군 등 세상을 속이는 것을 넘어 자신이 만든 세계를 진실이라 믿으며 거짓을 반복하는 사기꾼들은 애나 델비, 아니 애나 소로킨 이전에도 계속 있어왔다. 문제는 소셜미디어 등 약간의 노하우를 타고 누구나 거짓된 세계를 만들 수 있을뿐더러 그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일들이 많아졌다는 거다. 과연 애나 소로킨이 애나 델비로 몇 년씩이나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이 그의 능력만으로 가능했을까 생각해보자. 각자의 이유로 눈과 귀와 입을 가린 사람들, 그리고 세상이 그를 애나 델비로 만드는 데 일조한 게 아닌가.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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