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얼마 전 팩토리 베를린의 커뮤니티 메신저에서 한 메시지를 받았다. “안녕, 혹시 너희 회사에서 동유럽의 디지털 전문가 중 원격으로 일할 인재를 채용하는 것에 관심이 있니?” 이렇게 메시지로 채용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을 받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것보다도 ‘동유럽, 디지털 전문가, 원격, 채용’ 등 모든 단어가 나에게는 무척 생소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조지아 기반의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스타트업 ‘게깃제(Gegidze)’의 창업자 발레리안 게깃제(Valerian Gegidze)였다. 스타트업 게깃체는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2019년 창업해 동유럽의 디지털, 디자인, 크리에이티브 영역의 인재들을 채용하고 관리하는 HR 도구를 제공한다.
단순히 관련 인재 채용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팀을 구성해 고객사를 위한 디자인, 디지털 전환, 디지털 마케팅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한다. 현재는 베를린, 더블린, 바르샤바에 진출해 유럽 전역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인재 채용 및 관리 등을 용이하게 하는 툴을 제공한다.직접 보낸 메시지 덕분에 게깃체의 창업자 발레리안과 잠시 얘기 나눌 기회를 얻었는데, 발레리안은 나에게 동유럽에 뛰어난 IT 인재와 흥미로운 스타트업이 얼마나 많은지를 재차 강조했다. 이미 스타트업 생태계가 잘 알려진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에 비해 평소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 못했는데, 덕분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CEE 지역, 구글은 알고 있었다
사실 ‘동유럽’이라는 표현을 현지인들은 반기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했을 때 한국사람들이 분노하는 것과 유사하다. 실제로 이는 서유럽인의 관점에서 동유럽을 상당히 대상화하는 표현이고 무엇보다도 동유럽, 동구권이라는 말은 20세기 냉전 시대 공산국가라는 정치적, 역사적 범주에 따른 구시대적 명칭이라는 인식이 크다. 그래서 동유럽 하면 공산주의, 소련 등의 어두운 이미지가 자동으로 따라 붙기 마련이다.
실제 동유럽은 젊은 인재들에 의해 굉장히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름 때문에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마치 서양 사람들이 ‘한국’ 하면, 전쟁과 북한을 바로 떠올리며 ‘한국은 안전하지 못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편견에 싸여 그 잠재력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동유럽은 한국과도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요즘에는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뿐만 아니라 에스토니아 등의 발트국가, 조지아 등의 캅카스 국가, 구소련 국가를 통칭하여 CEE 지역(Central and Eastern Europ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CEE 지역은 스타트업에게 꽤 인기 있는 곳이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은 전자정부 시스템이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고, ICT 인프라가 가장 잘 갖추어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인 창업자에게 전자영주권(e-residency)을 발급해 회사를 설립하고 금융 거래를 할 수 있게 하면서 일찍부터 ‘스타트업의 성지’가 되었다.
구글은 2015년 11월에 폴란드 바르샤바에 구글 캠퍼스(Google for startup)를 열었다. 2012년 런던 캠퍼스를 시작으로 텔아비브, 마드리드, 상파울루, 서울에 이어 세계 여섯 번째로 바르샤바가 선정된 것이다. 수준 높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와 개발자 보유, 활발한 스타트업 관련 커뮤니티 등 기초 생태계가 잘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글 캠퍼스 바르샤바는 CEE 지역 스타트업 허브가 되었으며, 이곳을 통해 1800개 이상의 스타트업 커뮤니티가 생겨났다. 구글 조사에 따르면 중부 및 동유럽에는 약 100만 명의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있고 그중 50%가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에 집중돼 있다. 폴란드에서는 매년 480개 이상의 새로운 게임을 출시하는 440개가량의 게임 개발 스타트업이 있다. 폴란드에만 현재 약 4500개의 스타트업(2020년 기준)이 있는데, 이는 5년 전과 비교해서 2배 정도 증가한 수준이다.
#10년 동안 19배 성장, 보물 같은 CEE 지역의 스타트업들
2021년 10월 구글 포 스타트업(Google for startup), 벤처캐피털 아토미코(Atomico), 컨설팅 기업 딜룸(Dealroom)이 공동으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CEE 지역의 스타트업은 VC(벤처캐피털) 투자자금으로 40억 유로(5조 4000억 원) 이상을 유치했다. 말 그대로 이 지역의 스타트업들은 ‘돈을 쓸어 모으고’ 있다. 그리고 이 스타트업들의 가치는 현재 1860억 유로(252조 원)로 2010년 대비 19배나 성장했다.
이름은 익숙했지만 CEE 지역 출신인지 몰랐던 스타트업도 있다. 전설의 ‘스카이프(Skype)’이다. 에스토니아 출신 개발자들이 만들어 전 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인터넷 기반의 전화 및 화상통신 서비스다. 2013년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됐기 때문에 미국 회사라고 생각하지만, 시작은 CEE 지역이었다.
또 다른 전설로는 루마니아 출신의 기업 ‘유아이 패스(UiPath)’가 있다. 로봇 프로세스 자동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스타트업으로 부쿠레슈티에서 시작해 2017년에 고객이 가장 많은 미국의 뉴욕으로 본사를 이전하했다. 2020년에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최고 기술 기업으로 선정되고 뉴욕 증시에도 상장했다.
폴란드에 택배 배송 및 보관함 시스템을 정착시킨 스타트업 ‘인포스트(InPost)’의 성공은 코로나로 인해 더욱 가속화했다. 온라인 쇼핑에 익숙하지 않던 사람들도 모두 온라인으로 몰려들었고, 인포스트의 매출은 2020년에 전년 대비 104% 증가했다. 지금 폴란드로 배송되는 모든 화물의 36%를 인포스트가 처리한다. 아마존도 폴란드에 별도의 로커를 설치하는 대신 인포스트를 이용할 정도다. 유럽에서는 혁신적인 ‘당일배송’ 서비스를 출시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인포스트는 2021년 1월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기업가치는 97억 달러(11조 6000억 원)가량이었다. 이후 유럽으로 확장하기 위해 프랑스의 배송기업 몬디알 릴레이(Mondial Relay)를 인수했다.
모빌리티 스타트업 ‘볼트(Bolt)’는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시작한 스타트업계의 신화다. 차량 대여 및 공유, 전동킥보드와 같은 마이크로모빌리티, 음식배달까지 제공하는 서비스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현재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서아시아, 라틴아메리카까지 전 세계 45개국 300개 이상의 도시에서 운영되고 있다.
2013년 19세 대학생 마르쿠스 빌리그(Markus Villig)는 형 마틴(Martin Villig)과 함께 탈린과 리가의 택시를 하나로 모으는 플랫폼을 구상하면서 볼트(옛이름 Taxify)를 설립했다. 가족이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부모는 고객지원팀으로 회사 운영을 도왔고 5000유로의 앱 개발자금을 지원했다.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 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마르쿠스는 대학을 그만두고 사업에 전념했다.
2017년 런던의 지역 택시 회사를 인수해서 서비스를 제공했고, 2018년부터 전동킥보드로 범위를 넓혀 파리에 진출했다. 2018년 사용자 1000만 명을 돌파했고, 아프리카에서는 경쟁사였던 우버를 추월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2019년 회사명을 ‘볼트(Bolt)’로 바뀌고 음식 배달 서비스인 볼트푸드를 출시했다. 2021년 5월 카셰어링 서비스인 볼트드라이브까지 출시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회사가 설립된 지 벌써 9년째이지만 CEO는 93년생, 28세로 유럽 유니콘 기업 중 가장 어리다. 28세의 CEO 마르쿠스 빌리그는 2004년 에스토니아에서 설립된 스카이프를 보고 자기만의 기술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성공한 스타트업이 또 다른 스타트업의 꿈을 깨우고 문을 열어준 셈이다.
더 이상 ‘동’유럽이 아닌 세계의 중심이 된 ‘중부’ 유럽의 조용하고 강력한 성장이 전 세계를 사로잡을 날이 머지않았다. 중국과 일본에 가려졌다 이제 빛을 보는 한국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이들에게 더욱 관심이 생긴다.
필자 이은서는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왔다가 향수병에 못 이겨 다시 베를린에 와 살고 있다. 다양한 스타트업과 함께 일하며, 독일 시장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 한국 시장을 공략하려는 독일 기업을 안내하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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