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페터 빅셀의 단편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에서 주인공은 어느날 갑자기 일상의 무료함을 느낀다. 그는 남들과 똑같이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고, 시계를 시계라 부르는 일상에 변화를 주기로 한다. 사회가 정한 규칙을 벗어나 자기 맘대로 주변에 있는 물건들의 이름을 뒤바꿔 부르기 시작한다. 침대를 사진으로, 의자를 시계로. 심지어 동사까지 모두 다 자기 맘대로 바꿔 부른다. 결국 그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 자체를 나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자기 자신하고만 이야기를 하는 외톨이가 된다.
이 작품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사회가 정한 약속 아래 만들어진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일상 용어만이 아니다. 과학적, 천문학적인 정의도 그렇다. 과학자들이 혼란스럽지 않게 동일한 개념, 대상을 가리키고 이해할 수 있도록 개념을 부르는 용어와 정의를 합의한다. 이런 식으로 결정된 천문학적인 정의 중 대표적인 게 2006년 치열한 공방과 투표 끝에 만들어진 ‘행성’의 정의다.
한때 수금지화목토천해명, 태양계 주변 아홉 개의 천체를 지칭했던 행성의 정의는 명왕성과 비슷한 궤도에서 명왕성 못지않은 비슷한 크기를 갖는 소천체들이 마구 발견되면서 큰 혼란을 겪었다. 명왕성을 계속 행성으로 부른다면 새로 발견된 수백 개의 소천체들 역시 행성으로 불러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행성의 수가 너무 갑자기 많아진다. 결국 2006년 천문학자들은 명왕성을 포함한 새로운 소천체들까지 모두 행성으로 인정할지, 아니면 비뚤어진 궤도와 많이 작은 크기로 이전부터 거슬린 명왕성을 행성에서 쫓아낼지를 두고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수천 년간 명확한 정의 없이 관습적으로 사용해온 ‘행성’에 대한 과학적인 정의를 만들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행성의 정의에 따라 결국 명왕성은 행성의 지위를 잃게 되었고, 태양계 행성은 수금지화목토천해, 딱 여덟 개만 남게 되었다. (수금지화목토천해!라고 했을 때 명!이라고 더 외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면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태양계 행성으로 세대를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정의에 대해 지금도 적지 않은 행성천문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한다. 당시 국제천문연맹에서는 혼란스럽게 사용되던 행성이라는 단어에 ‘과학적인 지위’를 부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인류의 관습에 기댄 비과학적 정의라는 비판이 나온다.
최근 이 ‘행성의 정의’를 다시 더 과학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흥미로운 논문이 발표되었다. 논문 제목도 아주 대담하다. “달도 행성이다(Moons are planets)!” 명왕성 하나의 행성 지위를 복권하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달, 위성까지 모두 행성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냥 이상한 소리 취급하기에는 그 주장이 꽤나 논리적이다. 2006년 ‘급조’한 엉성한 정의가 아니라 제대로 각 천체의 특성을 반영한 더 과학적인 진짜 정의가 필요한 건 아닐까? 어쩌면 명왕성을 둘러싼 2차 전쟁의 불씨가 될지 모르는 이 논문의 신박하고 매력적인 주장을 소개한다.
달도 행성이다! 과연 행성의 정의는 다시 바뀔 수 있을까?
#달도 행성으로 불렀다!
흔히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거치면서 수금지화목토 여섯 개의 천체를 태양계 행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천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크게 착각하는 부분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후로도 200년 가까이 천문학자들은 여섯 천체뿐 아니라 지구의 달과 다른 행성 주변을 도는 위성들도 모두 ‘행성’이라고 불렀다.
이번 논문의 연구진은 400년 가까운 긴 시간 동안 발표된 행성과 관련된 논문, 책, 문헌을 샅샅이 뒤졌다. 태양 중심 모델을 받아들인 직후부터 천문학자들이 행성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해왔는지를 분석했다. 그 결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천문학의 역사가 사실은 크게 왜곡된 허구임을 밝혀냈다.
17세기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직접 달을 관측해 달 표면도 지구처럼 울퉁불퉁한 산맥과 골짜기로 덮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갈릴레오는 하늘에 떠 있는 달도 우리 지구와 똑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행성’일 것이라는 언급을 남겼다. 이후 목성 곁을 도는 거대한 위성 네 개를 발견했을 때에도 이들을 위성으로 구분하지 않고, 목성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또 다른 행성으로 지칭했다. 이 발견을 통해 하늘에 떠 있는 모든 행성이 지구를 중심으로 궤도를 돌고 있다는 믿음에 금이 가게 되었다. 갈릴레오가 발견한 목성 주변의 새로운 ‘행성’들은 지구가 아닌 목성이라는 또다른 곳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후 토성 주변에서 새로운 위성 타이탄을 발견했을 때에도 당시 천문학자 카시니, 하위헌스 등이 쓴 문헌을 보면 그들 역시 타이탄을 하나의 ‘행성’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신 이들은 지구나 목성처럼 직접 태양 주변 궤도를 도는 천체를 ‘주행성(Primary planet)’으로, 지구의 달이나 목성·토성의 위성처럼 태양 곁을 도는 큰 행성에 붙잡혀 함께 돌고 있는 작은 천체를 ‘부행성(Seconary planet)’으로 불렀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두 ‘행성’이라는 더 큰 카테고리의 하위 분류로 인식했을 뿐, 오늘날 행성과 위성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위성(Satellite)이라는 단어 자체도 천문학자 케플러가 수행원, 보디가드라는 뜻을 의미하는 라틴어 satellitibus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단순히 그 천체가 갖고 있는 역할, 직업을 의미할 뿐 행성과 다른 종류의 천체로 구분한 건 아니다. 누군가 수행원, 보디가드 일을 한다고 해서 사람이 아닌 건 아니듯이 말이다. 당시 케플러의 관점에선 지구도 달도 모두 똑같이 태양 곁을 도는 행성이었고, 달은 더 큰 지구 곁을 지키는 보디가드의 역할도 함께 맡고 있는 또 다른 행성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17~18세기 천문학자들이 생각한 행성의 정의는 어떤 의미였을까? 갈릴레오는 흥미로운 기준을 적용해 태양과 같은 별, 그리고 지구·목성과 같은 행성을 구분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스스로 직접 밝게 빛나는 천체는 ‘별’이라고 불렀고, 스스로 빛나지는 않지만 태양 빛을 반사하면서 하늘에서 밝게 보이는 모든 천체를 ‘행성’으로 불러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태양 빛을 밝게 반사하는 목성·토성과 같은 가스 행성뿐 아니라 똑같이 태양 빛을 반사해 빛나는 밝은 달 역시 행성에 들어간다.
게다가 갈릴레오는 지구에 반사된 태양빛이 초승달의 어스름한 영역 위로 다시 비치는 지구조 현상도 발견했다. 이를 통해 그는 지구 역시 달과 마찬가지로 직접 빛나지는 않지만 태양 빛을 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같은 기준을 적용해 지구가 태양 빛을 반사하며 빛나고 있기 때문에 지구 역시 단지 태양 주변을 도는 행성 중 하나라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했다.
이처럼 천문학자들은 달, 위성도 행성의 하나로 생각하며 별다른 구분 없이 불렀다. 코페르니쿠스 이후에도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후 천왕성이 발견되었을 때에도, 다른 행성 곁에서 여러 위성이 발견되었을 때에도, 화성과 목성 사이에서 수많은 소행성이 발견되었을 때에도 이들 모두 구분 없이 행성으로 불렀다. 지질학적으로 동일하고 차이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각 천체가 그리는 궤도가 어떤 모양인지는 부수적인 성질일 뿐, 각 천체의 본질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성질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천문학자들이 바뀌었다.
#점성술적인 관습에 따라간 천문학자들
연구진의 분석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후에도 천문학자들이 논문에서 표현하는 행성에 대한 정의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18~19세기를 넘어오면서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먼저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천문학자가 아닌 비전문가 일반 시민들이 쓴 교과서, 대중교양서, 여러 문헌에서 갑자기 태양계 ‘행성’의 의미를 딱 수금지화목토천해 여덟 개의 덩치 큰 주요 천체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당시는 아직 명왕성이 발견되기 전이었다.)
왜 이런 일이 갑자기 벌어졌을까? 수백 년간 쓰인 문헌을 분석한 연구진은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인 태양 중심 모델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점성술적인 관습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일반 대중의 심리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전통적으로 고대 점성술은 지구의 하늘에서 배경 별과 달리 눈에 띄게 자리를 바꾸며 움직였던 천체마다 각자의 신화, 이야기를 붙이면서 만들어졌다. 인류가 알고 있는 행성의 개수가 겨우 네다섯 개 수준이었을 때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19세기로 들어오면서 너무나 많은 위성, 소행성이 발견되었다. 그 많은 ‘행성’에 전부 신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에는 신화 속 신이 너무 부족했다.
한편 이러한 점성술의 잔재로 인해 태양계 행성은 체계적인 서열,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는 관점이 자리 잡은 상태였다. 딱 덩치 큰 주요 천체들만 태양계 행성으로 부른다면 깔끔하게 수금지화목토천해라고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각 행성 곁을 도는 위성, 또 서로 비슷하게 겹친 궤도를 돌고 있는 소행성까지 모두 포함하면 태양계 행성의 순서 배치를 깔끔하게 정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요 천체를 제외한 위성과 소행성을 ‘행성’보다 아래 단계의 중요하지 않은 천체로 격하하는 관습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위성들은 그 중심에 있는 행성 곁을 맴돌기 때문에 지구의 밤하늘에서 항상 중심의 행성과 같은 자리에서 보인다. 점성술사들은 굳이 중심의 행성과 위성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덩치 큰 주요 행성들만 점성술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고, 똑같이 움직이는 위성들에는 별다른 점성술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결국 과학과는 거리가 먼 이런 민간의 관습으로 인해 태양계 ‘행성’은 덩치 큰 수금지화목토천해라는 인식이 대중에게 퍼지게 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만들어진 민간의 관습을 시간이 흐르면서 천문학자들이 받아들이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시대별로 천문학자들이 쓴 과학 논문, 교사들이 쓴 과학 교과서, 일반 시민들 사이에 구전되고 작성된 문헌에서 사용한 태양계 ‘행성’의 변화를 비교해 이 사실을 수치로 확인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천문학자들이 별다른 저항 없이 민간의 비과학적인 관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걸까? 행성천문학 분야의 슬픈 역사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아래 그래프는 170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해마다 출간된 행성천문학 분야 논문의 수를 보여준다. 꾸준히 증가하던 논문 수는 1781년 천왕성의 발견과 함께 더 급격하게 증가한다. 그런데 갑자기 1900년에서 1950년 사이에 약 50년간 논문의 증가가 정체하는 구간이 보인다. 이 시기는 태양계 행성에 대한 천문학자들의 관심이 갑자기 뚝 떨어졌던 시기다. 이 시기를 ‘행성천문학의 대침체기(GDPS, Great Depression of Planetary Science)’라고 부른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태양계 행성에 관한 천문학자들의 관심이 뚝 떨어진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일단 관측 기술이 현대화되면서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수의 태양계 소천체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가끔 덩치 큰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는 시대는 지나버렸다. 세월아 네월아 밤하늘만 쳐다보며 소천체를 찾는 시시한 일 따위로는 천문학자로서 인정받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게다가 태양계 천체들을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재밌는 연구거리들이 쏟아졌다. 우리 은하 바깥 수많은 외부은하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우주가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태양이 아닌 다른 별 곁을 도는 외계행성을 찾는 일이 더 매력적이고 블랙홀, 중성자별과 같은 이론으로만 남아 있던 극단적인 천체들의 존재가 하나하나 밝혀지던 시대였다. 이전까지 태양계가 연구해야 할 우주의 전부인 줄 알았던 천문학자들은, 태양계 행성보다 훨씬 재밌는 세상을 만났고 많은 천문학자들이 다른 분야로 빠져나갔다.
50년간의 침체기를 보낸 행성천문학 분야는 1950년대가 지나면서 두 번째 부흥기를 맞이했다. 드디어 로봇 탐사선을 직접 보내 다양한 태양계 행성을 곁에서 보고 사진을 찍고 탐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앞의 그래프를 보면 침체기 이후 1950년의 시작과 함께 행성천문학 분야의 논문 수가 다시 빠르게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일반 대중 사이에서 태양계 행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가장 빠르게 자리 잡은 시기가 행성천문학 분야의 침체기와 일치한다. 이 암흑기와 맞물리면서 천문학자들 역시 태양계 행성에 대한 일반 대중의 오개념을 바로잡을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5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천문학자들 역시 과학이 아닌 점성술의 잔재로 형성된 태양계 행성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 침체기에 ‘조그마한 위성과 소행성은 행성과는 다른 종류’라는 인식이 하나의 정립된 과학적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래 그래프는 수백 년간 발표된 천문학 논문에서 ‘작은 행성(Small planet, minor planet)’이라는 단어가 ‘소행성(Asteroid)’이라는 단어 대비 얼마나 많은 빈도로 등장했는지를 비교한 것이다. 원래는 ‘소행성’의 절반 정도의 적지 않은 빈도로 ‘작은 행성’이라는 표현도 많이 쓰였다. 그런데 1900년대 침체기를 맞이하면서 점점 ‘작은 행성’이라는 표현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침체기가 끝난 1950년대에는 천문학자들의 논문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다시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천문학자들이 혼란을 겪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명왕성과 비슷한 크기와 궤도를 갖고 있는 수많은 소천체들이 폭발적으로 발견되면서 50여 년간 잊힌 채 쓰이지 않고 있던 ‘작은 행성’이라는 표현이 다시 점차 증가했다.
실제 천문학의 역사를 다시 명확하게 들여다보면, 천문학자들은 원래부터 위성과 소행성도 수금지화목토천해와 똑같은 행성의 하나로 분류했다. 물론 덩치 큰 주요 행성에 비해서는 크기도 작고 궤도도 복잡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이 작은 천체들의 ‘역할’을 보여주는 것일 뿐, 모두 동일한 행성의 하위분류에 포함됐다. 그런데 태양계 행성들에게 점성술적인 서열과 의미를 부여하던 민간의 잔재로 인해 수금지화목토천해 덩치 큰 주요 천체들만 행성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비과학적’인 관습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하필이면 태양계 천체에 대한 천문학자들의 관심이 소홀해지는 대침체기를 겪게 되면서, 결국 민간에서 시작된 이 잘못된 관점이 그대로 천문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번 문헌 분석을 통해 연구진은 천문학자들조차 “수금지화목토천해 주요 천체만을 행성으로 불러야 한다”라는 비과학적 인식이 과학적인 근거에 기반했다는 오해를 갖게 되었고, 이 같은 오해 속에서 2006년의 투표가 진행되는 바람에 너무나 비과학적인 방식으로 행성을 정의하는 잘못된 결과가 나왔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행성의 정의는 어때야 하는가
2006년 당시 국제천문연맹 회의를 통해 통과한 ‘행성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태양 주변 궤도를 돌아야 한다.
△충분히 질량이 커서 둥근 형태를 가져야 한다.
△주변에서 가장 지배적인 궤도를 가져야 한다.
이 마지막 조항으로 인해 명왕성은 행성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명왕성은 자신의 절반 크기인 위성 카론과 함께 서로의 곁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조항이 과학적인 기준이 될 수 있는가를 두고선 여전히 비판이 많다.
특히 ‘궤도’는 그 천체가 가진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는 큰 문제가 있다. 태양 곁을 도는 행성, 소행성, 혜성 등 다양한 천체들의 궤도는 태양과 자신뿐 아니라 주변을 지나가는 다른 덩치 큰 천체들의 중력에도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바뀐다. 그래서 외부 영향으로 인해 궤도가 바뀔 때마다 똑같은 천체가 어떨 때는 행성으로 불리고 어떨 때는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일이 생긴다.
이런 일이 우리 지구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 지구도 사실 명왕성처럼 자기 덩치에 비해 그리 작지 않은 위성 달을 거느리고 있어서 달이 계속 멀어져서 결국 아주 멀리 벗어나 버린다면 지금의 명왕성-카론처럼 지구-달도 서로의 곁을 맴도는 궤도를 갖게 된다. 이때가 되면 2006년 인간 스스로가 만든 잣대에 따라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마저 행성이 아닌 것으로 강등당할 것이다.
심지어 원래는 고향 별에 잘 붙잡혀서 궤도를 돌고 있던 행성들이 우연히 곁을 지나간 또 다른 별의 중력에 의해 궤도를 잃고 우주 공간을 떠돌게 되는 떠돌이 행성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또 흥미로운 건 천문학자들이 명왕성은 그 불안정한 궤도를 근거로 ‘행성’이 아니라고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이런 떠돌이 행성들은 ‘행성’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궤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면 중심에 별도 없이 혼자 우주 공간을 부유하는 떠돌이 행성보다는, 중심 별 태양 곁에 붙잡혀서 약간 복잡한 궤도를 돌고 있는 명왕성이 더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번 연구에서 연구진은 천체 자체의 성질과 상관 없이 그저 천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만을 보여주는 궤도를 근거로 무엇이 행성이고 행성이 아닌지를 구분하는 건 비과학적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의 비유를 빌리자면, 이건 포유류를 ‘땅 위를 뛰어다니는 동물’이라고 정의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실제 포유류, 양서류를 구분하려면 그 동물 자체의 성질, 피부, 골격 구조, DNA 등을 근거로 분류해야 한다. 고래는 땅이 아닌 물 속에서 살지만 포유류다. 반면 땅 위에서 지내는 곤충은 포유류가 아니다. 땅 위를 날고 바닷속을 헤엄치는 건 그저 각 동물의 활동 영역이지, 그것 자체가 동물을 분류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대체 ‘행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흥미롭게도 연구진은 천체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 성질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복잡도(Complexity)’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태양계 행성, 위성 등 다양한 천체들은 아주 다양한 성질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암석 위성과 행성은 표면에 울퉁불퉁한 산맥과 지질활동의 흔적을 갖고 있다. 토성의 위성 타이탄은 표면에 호수가 존재하고 아주 두꺼운 대기권도 있다. 목성의 위성 유로파, 토성의 위성 엔셀라두스는 두꺼운 얼음 표면이 있고 그 아래 바다도 존재한다. 목성의 위성 이오에선 활발한 화산의 흔적도 볼 수 있다. 뉴호라이즌스 탐사선이 곁을 지나면서 포착한 명왕성의 모습을 보면, 명왕성도 이들 못지않게 활발한 지질활동의 흔적과 복잡한 특징을 많이 갖고 있다.
하지만 행성보다 훨씬 크기가 작은 성간 먼지나 소행성은 성질이 훨씬 단순해진다. 소행성에는 바다도 없고 대기도 없다. 마찬가지로 행성보다 훨씬 덩치 큰 별, 블랙홀의 성질 역시 단순하다. 큰 별과 블랙홀에는 산맥과 골짜기도 없고, 구름도, 호수도, 바다도 없다.
아주 작은 전자 한 개부터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우주에 있는 것들이 스케일에 따라 얼마나 높은 복잡도를 갖고 있는지를 비교하면, 흥미롭게도 딱 태양계 행성과 위성이 해당하는 질량 범위에서 눈에 띄게 복잡도가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너무 질량이 부족하면 중력이 너무 부족해서 충분히 둥근 모양을 가질 수 없다. 내부의 온도도 뜨겁지 못해서 강한 자기장과 지질활동, 화산, 호수 등 복잡한 성질을 얻을 수 없다. 반대로 너무 질량이 무거워지면 이제는 내부에서 핵융합 반응이 벌어질 수 있는 조건을 넘어버린다. 그래서 표면에 산맥과 바다, 호수가 있는 행성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모두 다 불타는 화염으로 덮인 단순한 별이 된다.
따라서 외부 요인으로 인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궤도’와 같은 애매한 기준이 아니라 천체 자체의 성질만을 기준으로 다시 ‘행성’의 정의를 만든다면 아래와 같이 만들 수 있다.
△질량이 충분히 커서 충분히 둥근 형태를 갖는다.
△질량이 너무 크지 않아서 내부에서 핵융합 반응은 벌어지지 않는다.
연구진은 이렇게 질량의 상한과 하한을 기준으로 한다면 훨씬 깔끔하게, 그리고 민간의 점성술적인 관습과 무관한 ‘과학적’인 관점으로 행성을 구분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게다가 딱 이 범위에 들어오는 ‘행성’들만 다른 종류의 천체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높은 복잡도를 보여준다.
2006년에 통과된 행성의 정의는 ‘의도적’으로 명왕성과 다른 소천체들을 쫓아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매끄럽게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물리량을 근거로 기준을 나눈 것도 아니다. 그냥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번에 새롭게 제시된 이 방식은 깔끔하게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질량과 복잡도라는 물리량에 상한과 하한만 딱 그어줌으로써 훨씬 과학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태양계 주변을 맴도는 소행성 이상의 거의 모든 천체들은 다 ‘행성’에 포함된다. 수금지화목토천해뿐 아니라 명왕성, 그리고 현재 위성과 왜소행성으로 불리는 천체들도 다 행성이 된다. 이 모든 행성을 성질에 따라 하위분류를 해보면 아래 밴다이어그램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지구, 화성, 수성, 달, 세레스는 모두 규산염 광물을 갖고 있는 행성이다. 여기에 명왕성, 타이탄, 유로파까지 하면 이들 모두 화산 활동을 하고 있는 행성이다. 바다를 갖고 있는 행성으로는 지구, 명왕성, 타이탄, 유로파, 이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각 행성의 특징만 다른 것일 뿐, 위성, 왜소행성과 같은 모호한 기준 없이 모두 깔끔하게 행성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 주장의 핵심이다.
2006년 투표 당시 천문학자들을 가장 불편하게 만들었던 건 “명왕성 근처에서 계속 소천체들을 발견하다간 행성이 너무 많아지게 된다”는 부분이었다. 이번 논문이 연구진은 애초에 왜 그러면 안 되는가 역질문을 던진 셈이다. 태양계 행성이 너무 많아지면 곤란하다는 관점 자체가 민간의 점성술적인 잔재라는 것이다. 과학적 기준에 따라 정의할 수 있다면 행성이 8개가 되든, 9개가 되든, 천 개 만 개가 되든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많은 행성과 짝지을 만한 신의 개수가 부족해진 점성술사들만 빼고 말이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이번 논문의 공저자에 명왕성을 탐사한 뉴호라이즌스의 책임자 앨런 스턴도 있다는 점이다. 2006년 1월 뉴호라이즌스가 지구를 떠나던 순간만 해도 명왕성은 태양계 마지막 행성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그해 여름 명왕성은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지구에서 이런 혼란스러운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모르고 뉴호라이즌스 탐사선은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으로 불리던 시절의 기억만 간직한 채 명왕성에 도착했을지 모른다. 그만큼 뉴호라이즌스 팀에겐 ‘행성 명왕성’에 대한 추억이 더 각별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이번 논문의 주장을 명왕성 극성 지지자들의 억지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2006년 급조된 행성의 정의에는 과학적으로 엄밀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태양계 바깥 다른 별 곁을 도는 다양한 외계행성들이 막 발견되던 시점에 만든 조항이다 보니, 최근에 발견된 훨씬 복잡하고 이상한 궤도를 돌고 있는 외계행성들을 품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 전 세계 천문학계에서 “명왕성 퇴출 결정은 과학적이었다!”는 인식이 아직은 우세하지만, 2006년에 만든 엉성한 ‘행성 기준’의 수명도 그리 길지는 않을 것 같다.
‘명왕성이 행성인가 아닌가’는 우주가, 명왕성이 결정해주는 문제가 아니다. 이 우주를 바라보는 인간들이 (입맛에 맞게) 어떻게 정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이 제멋대로 주변 사물들의 이름을 정해서 불렀던 것과 같다. 만약 또다시 위성, 왜소행성을 행성으로 포함하는 새로운 정의가 받아들여진다면, 명왕성은 왜소행성이 아니라 곁에서 함께 돌고 있는 위성 카론과 함께 행성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명왕성과 카론은 서로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이중 행성(Binary planet)’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1930년 처음 발견된 직후 행성으로 불리다가, 돌연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했다가, 또 다시 행성의 지위를 돌려받게 된다면 명왕성은 인간들의 결정 번복을 어떻게 생각할까? (다시 명왕성이 행성으로 복권된다면, 그때는 명왕성 없이 “수금지화목토천해!”라고 해도 찝찝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시 옛날 사람 취급을 받게 될지 모르겠다.)
과학적 정의와 법칙은 우주, 자연에 내재되어 있던 본연의 특징을 인간이 ‘발굴’해내는 것인가? 아니면 우주 본연의 특징과는 무관하게, 단순히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인간들의 언어로 쉽게 이해하고 번역하기 위해 인간들이 ‘발명’해내는 것인가? 명왕성과 행성의 정의를 둘러싼 논쟁은 수 세기째 과학철학자들 사이에서 이어지는 이 고민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인간의 언어로 만든 투박한 서랍 속에 우주를 분류하고, 정의하고, 우겨넣는 것은 너무나 고되고 어려운 일이다. 그 서랍을 더 세련되게 디자인하고 개선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과학’이다.
참고https://www.iau.org/static/resolutions/Resolution_GA26-5-6.pdf
필자 지웅배는? 고양이와 우주를 사랑한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은하진화연구센터 및 근우주론연구실에서 은하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진화를 연구하며, 강연과 집필 등 다양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하고 있다. ‘썸 타는 천문대’, ‘하루 종일 우주 생각’, ‘별, 빛의 과학’ 등의 책을 썼다.
지웅배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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