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나쁜 돈 쫓는 국가 공인 전문가가 온다.’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트레이서’(MBC 금토드라마)는 한 줄 설명만으로도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국가정보원, 검찰청, 경찰청과 함께 ‘4대 권력기관’에 속하는 국세청을 배경으로, 극중 ‘쓰레기 하치장’이라 불리는 조세5국을 중심으로 독한 놈들의 물불 안 가리는 활약을 담는 추적 활극이다. 한 마디로, 세금 안 내는 나쁜 놈들의 돈을 끝까지 추적한다는 소리다. 탈탈 털거나 박살내는 방식으로.
물론 우리는 악질 체납자의 돈을 탈탈 터는 통쾌한 활극을 본 적이 있다. 2016년 OCN에서 방영했던 ’38사기동대’ 말이다. 물론 ’38사기동대’의 모델인 38기동대는 국세청 소속이 아니라 서울특별시 소속이고, 드라마 속 세금 징수 공무원들은 사기꾼 양정도(서인국)를 이용해 세금을 징수하는 스토리였던 반면 ‘트레이서’는 아버지에 반발해 대기업의 뒷돈을 관리하던 회계사 황동주(임시완)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국세청에 들어가 나쁜 놈들의 뒤를 캐는 한편 과거 사건에 얽힌 진실을 밝히는 것이 다르다. 조직 내부에 들어가 혈육의 죽음을 캔다는 설정은 많이 보아왔던 스토리지만, 그것이 대중문화에서 흔하게 보여왔던 검찰이나 경찰, 국정원 등이 아니라 국세청이란 점에서 제법 신선하게 다가온다.
‘트레이서’는 활극이라는 장르답게 황동주가 아버지의 죽음을 맞아 각성하고 국세청에 입문해 조세5국 팀장으로 오기까지, 그리고 영리한 전략으로 아버지의 죽음에 주요 인물로 꼽히는 중앙지방국세청장 인태준(손현주)에게 접근해가는 과정을 속도감 넘치게 그려냈다. 단 4회 만에 다섯 명의 조세국장 중 두 명이 그 자리를 내놓게 되었고, 국세청 내부 인물과 거래를 하며 세금을 탈루하던 동호증권 양영순 회장(우현)과 오즈식품 신다혜 이사(임선우)가 죄의 대가를 받게 된다. 그 속도감 넘치는 전개에서 임시완은 바다 만난 황새치마냥 발군의 연기를 펼친다. 천연덕스럽게 능글맞다가도 적재적소에 ‘팩폭’을 일삼는 황동주를 유려하게 연기하며 극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것. 양영순 회장의 집에서 숨겨진 비자금을 찾아내곤 거침없이 해머로 가벽 기둥을 휘둘러 가격하는 모습은 통쾌하기 그지없고, 본청 회의가 진행되는 대회의실을 거침없이 들어가 “이의 있습니다!”라고 소리치는 모습은 다음 화를 안 볼 수 없게 만든다.
임시완이 거침없이 뛰놀 수 있는 것은 그를 뒷받침하는 쟁쟁한 배우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배역명과 직위로 언급되는 인물만 십수 명인 ‘트레이서’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다. 최종 빌런으로 보이는 인태준 역의 손현주를 위시로, 선역인 듯 보이나 모종의 비밀을 지니고 있는 세상 무기력한 조세5국 과장 오영 역의 박용우, 조세5국 팀 조사관 서혜영 역의 고아성, 국세청 서열 2위 차장 민소정 역의 추상미 등이 탄탄한 연기력으로 극을 풍성하게 한다. 손현주는 역시 손현주이고, 12년 만에 드라마로 복귀한 추상미와 지상파 드라마에서 간만에 보는 박용우 또한 반갑기 그지없다. 이외에도 노련한 국세청장으로 분한 박지일, 인태준과 척을 진 관계로 보이는 재송건설 회장 역의 김병기, 조세3국장을 연기한 전배수 등 촘촘한 출연진 중에서도 존재감을 보이는 배우들이 여럿 등장한다.
‘트레이서’는 누구나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세금, 즉 돈을 소재로 하기에 절로 관심이 간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납세의 의무가 있다. 그러나 얄궂게도 누구나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는 건 아니다. 국세청이 작년 연말 공개한 고액·상습 체납자 명단을 보면 7016명의 고액·상습 체납자와 37개의 불성실 기부금 수령단체, 73명의 조세포탈범이 포함돼 있다. 이들의 체납액은 무려 5조 3612억원. 2022년 외교부와 법무부의 예산을 합해도 5조 891억원으로 이들의 체납액보다 낮을 정도니, 말 다 했다. 세금을 탈세하고 돈을 숨기는 자들과 이를 추적하는 자들의 쫓고 쫓기는 과정은 양영순 회장과 신다혜 이사의 케이스처럼 통쾌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서혜영 조사관이 마주한 사람처럼 명의 도용으로 1억 9000만원의 빚을 지고 자살까지 시도하는 가슴 아린 사연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 물론 국세청이 배경인 만큼 가슴 아린 사연보다는 나쁜 놈들, 거대한 권력의 돈을 쫓는 ‘사이다’ 장면이 많을 것으로 기대된다. 길어지는 팬데믹 시대에, 고구마보다는 사이다처럼 톡 쏘는 유쾌, 상쾌, 통쾌한 스토리가 쭉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뭐니 뭐니 해도, 나쁜 놈들 단죄만큼 죄의식없이 짜릿하게 즐길 수 있는 게 또 없으니까.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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